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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규대사의 숨결이 남은 승군의 현장 ‘갑사’
정진해
 
정진해 문화재 전문위원 기사입력  2017/07/14 [15:39]

문화재 : 갑사 사적비(충남 유형문화재 제52호)
          갑사 표충원(문화재자료 제52호) 
          갑사 팔상전(문화재자료 제54호) 
소재지 :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갑사


▲ 갑사 일주문     © 정진해

갑사로 들어가는 길에 줄지어 우거진 느티나무는 가볍게 걸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한다. 연밭에 피워내는 하늘만큼 넓은 잎과 연꽃을 피우려는 연봉오리가 조합을 이뤄 공간을 가득 메웠다. 일주문 공포에 걸린 ‘鷄龍山甲寺’ 현판은 이곳부터 계룡산 내에 갑사가 있음을 알리는 첫 번째 관문이다. 일주문은 두 개의 기둥이 나란히 서서 지붕을 덮고 있는 문이라는 의미이다. 단호한 결심과 실천 의지를 갖추고 구도자의 길을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진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경계 선상에서 새로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약속이기도 한 문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 느티나무의 위용은 하늘을 덮었고, 틈새의 어우러진 갈참나무는 하늘을 향해 손짓하고 있는 여정의 풍경이다. 사찰의 세계로 향하는 할머니의 발걸음도 작은 보따리에 엮인 작은 정성은 바라고, 버리고, 소유하기 위한 발걸음이 아니겠는가? 숲을 지나 사천왕문에 이르러서야 사찰의 영역을 짐작하고 수행자의 길이 순탄치 않음을 느껴온다. 사방을 상징하는 천왕은 인간의 선악을 관찰하고 수행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불법을 수호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각종 기물을 들고 문을 수호한다는 큰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 갑사 사천왕문     © 정진해

갑사는 계룡사의 서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동학사와 대칭되고 있다. 동학사는 아침 일출을 가장 먼저 받는 사찰이지만, 갑사는 계룡산을 넘는 해를 가장 오랫동안 받는 사찰이다.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백제 땅이었던 계룡산을 지나고 있을 때 상서로운 빛이 하늘로 뻗쳐오르는 것을 보고 이곳에 절을 짓고 갑사라 하였다고 한다. 이 떼가 백제 구이신왕 원년인 420년이다. 위덕왕 3년(556)에 천불전과 진광명전, 대광명전을 혜명대사가 중건하였다. 이어 의상대사가 당우를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도량의 법맥을 이어 전국의 화엄 10대 사찰 중의 하나가 되었다. 신라와 고려를 거치고, 조선 시대에 와서 1597년 정유재란으로 전각이 소실되어 새롭게 중수를 거치면서 다양한 건물이 들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 갑사 부도전     © 정진해

갑사를 둘러보기 위해 먼저 승탑전을 찾았다. 사천왕문을 바라보고 좌측 숲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모두 18기의 승탑은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석종형 형태를 따르고 있다. 자연석을 이용하여 승탑전 앞 계단을 놓고 장방형의 승탑전에는 철제 난간을 두어 출입을 막고 있다. 승탑 중 몸돌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건립연대와 주인공을 알 수 있으나 오랜 풍화로 인해 글씨의 판독이 어려운 승탑도 있다. 탑명과 건립시기를 알 수 있는 승탑은 2기 뿐이다. 나머지는 언제 건립하고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1657년에 건립한 ‘玄隱堂(현은당)’과 1815년에 건립된 樂西堂(낙서당)이다. 현은당 승탑은 지대석에 연꽃잎이 둘러진 기단과 종형의 몸돌, 지붕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낙서당 승탑은 지대석에 원형의 기단과 종형의 몸돌로 이루어졌으며, 지붕돌은 없다.

▲ 갑사 사적비     ©정진해
 
승탑을 지나서 전각이 가까워지면서 넓은 암반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부에 지붕돌을 갖춘 비 한 기가 자리하고 있다. 이 비는 ‘갑사 사적비(충남 유형문화재 제52호)’이다. 넓적한 바위를 파고 그 위에 판석을 세운 비로 글씨는 촘촘히 음각되어 있다. 대부분 비석은 이수부에 용 두 마리가 서로 엉켜 구름 속을 회유하는 모습으로 조각하는데, 이곳의 이수부 지붕돌에는 내림마루에 납작 엎드린 용의 모습을 새겼다. 지붕의 추녀 아래에는 연꽃문양을 둘러 언제나 불법이 있음을 표현하였다.

이 비는 갑사의 창건과정과 역사적 사실을 비 4면에 빼곡히 새겼으나, 일부가 파손되어 해독이 어려운 상태로 남아 있다. 이 비가 일부 파손된 것은 마을 주민들의 낭설로 인해 훼손되었다. 이 비석재 속에 금이 들어 있다는 낭설로 주민들이 금을 파내기 위해 훼손하였다고 전한다. 자연 암반에 비좌를 만들고 전면에 연화문을 새겼고, 비몸의 윗부분에는 “公州鷄龍山甲寺事蹟碑銘”이라 옆으로 새겼다. 비문 끝에 새겨진 “崇禎十七年甲申後十六年己亥九月日立”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현종 원년(1659)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여주 목사 이지천이 짓고, 공주 목사 이기징이 썼다고 기록되었다.

▲ 갑사 표충원     © 정진해

대웅전 영역 밖에는 표충원과 팔상전이 우측에 배치되어 있고 좌측에는 대적전이 위치하고 있다. 사적비에서 가까운 표충원은 휴정과 유정,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장 영규대사가 승군 700명을 선발하여 청주에서 의병장 조헌과 합세하여 청주를 되찾았지만, 금산에서 왜병과 싸워 전사하였다. 영규대사의 승명은 전국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훗날 그의 충정을 포상하여 ‘복구우세기허당일합대선사’로 추증하고 갑사 경내에 사당 포충원(충남 문화재자료 제52호)을 1738년에 강시영이 세웠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894년에 다시 복원하여 휴정과 유정,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셨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다듬은 돌 3단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운 주심포 형태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지붕 좌우에는 비바람을 막을 풍판을 달았다. 정면 2칸은 띠 살창문 2짝씩 달고 문 양옆의 공간은 판벽을 설치하였다. 내부에는 3분의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사당 둘레에는 토석담을 둘렀고 건물 앞쪽 좌측에는 정인보가 지은 글을 바탕으로 1972년에 세운 ‘의승장영규대사기적비’가 세워다. 사각형의 높은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중앙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비좌를 놓고 비를 세웠으며 이수는 2마리의 용이 서로 엉켜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 갑사 팔상전     © 정진해

담장으로 표창원과 팔상전이 구분되어 있으며, 표창원 정문에서 다시 팔상전 정문으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팔상전이 자리하고 있다. 돌과 흙을 이용하여 쌓은 담장은 기와를 얹었고, 출입문은 2개의 기둥을 좌우의 담장과 연결하고 겹처마의 맞배지붕을 얹었다. 두 짝의 판문을 달았으며, 정면과 좌측에는 요사체가 있다. 계룡산 방향으로 2단의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로 맞배지붕에 다포양식으로 짜인 공포의 전체에는 금단청을 하였다. 팔상전 건물은 다듬은 돌을 2~3단을 쌓고 자연석을 이용하여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고, 정면 각 칸에는 3개의 띠살문이 달았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의 일대기를 8부분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탱화가 배치되어 있다.

팔상도를 보면, 첫 번째가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으로,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마야부인의 태중으로 내려오는 장면이고, 두 번째가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으로,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는 장면이다. 세 번째는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으로, 싯달타 태자가 동서남북 각각의 성문 밖으로 나가서 세상을 두루 살펴보는 장면이고, 네 번째가 유성출가상(逾城出家相)으로, 태자의 신분을 버리고 성을 뛰어 넘어 출가자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장면이다. 다섯 번째는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로,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 고행 정진하는 장면이고, 여섯째는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으로, 나무 아래서 선정을 닦으며 마왕을 굴복시키는 장면이다. 일곱 번째는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으로, 깨달음을 성취한 뒤 녹야원에서 설법을 펴는 장면이고, 마지막 여덟 번째는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으로 사라 쌍수 아래서 입적하는 장면이다.

▲ 갑사 강당     © 정진해

대웅전 구역으로 들어서기 위해서 강당으로 발길을 옮겨야 한다. 대웅전 앞에 자리한 강당은 옛 모습이 아닌 것 같다. 실제 출입문으로 사용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강당건물 좌우로 계단을 만들어 출입이 가능하고 누각의 아래에는 자연석으로 모두 막아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강당을 보수하면서 드러난 상량문에는 정문이라고 쓰여 있으며, 이 건물이 처음 지어진 때는 1614년(광해군 6년)에 상량하였고, 그 후 1798년(정조 22)에 중수하고, 1890년(고종 27)에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강당은 스님들이 법문을 강론하던 건물이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지은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당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이고, 다포식 건물이다. 건물의 정면 3칸 중 좌우의 칸은 각각 두 짝의 판문을 달고 청룡과 황룡을 그렸고, 가운데 칸의 문은 2단의 궁판을 조합한 정자살창의 4분합문을 달았다. 건물의 외부는 청색의 모도단청을 하였다.

‘계룡갑사(鷄龍甲寺)’ 라는 현판은 절도사 홍제의가 쓴 글씨이다. 건물의 뒤쪽, 즉 대웅전과 마주하는 쪽의 각 칸에는 정면의 중앙 칸의 문짝과 같이 2단의 궁판을 조합한 정자살창 4분합분을 달았다.

▲ 월인석보 판본각     © 정진해

갑사에는 <월인석보>를 새겨 책으로 찍어내던 판각(보물 제582호)이 현재 남아 있는데 유일한 목판이다. 월인청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한 것이 월인석보이며, 이는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불교대장경인데, <석보상절>은 세종 28년(1446)에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이 불교서적을 참고하여 지은 것이다. <월인천강지곡>은 세종 29년(1447)에 세종이 석보상절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라 찬가를 지은 것이다. 본래 <월인석보>는 본래 57매 233장으로 모두 24권이었으나 현재 이곳에는 21권 46매만 남아 있다고 한다. 『월인이 판목은 선조 2년(1569) 충청도 한산에 사는 백개만(白介萬)이 시주하여 활자를 새기고, 충남 논산 불명산 쌍계사에 보관하였다. 현재 갑사에 소장된 것은 계수나무에 돋을새김으로 새겼고, 시주자의 이름과 새긴 이의 이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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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7/14 [15:39]  최종편집: ⓒ w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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