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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에서 ‘프로이트’를 만나다.
[연재-59회] 이병창 교수의 유럽철학기행
 
이병창 교수 기사입력  2017/03/23 [10:20]

5월 10일 비인-4

1) 자유란?

비인에서 마지막 가볼 데가 있다. 바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집이다. 지금은 박물관이 되었다. 그의 집은 언덕을 둘러싼 대로를 건너 베토벤의 집 맞은편 구역에 있다고 들었다.(정확하게는 비스듬하게 다뉴브 강 쪽으로 가로질러가야 한다) 홍 교수가 다리가 아파 더 걷지 못한다. 하는 수 없이 스테판 대성당 앞에서(거기 전철역이 있으니까) 기다리라 하고, 내가 혼자 나섰다. 약속 시각을 정해 두었다. 거리상 얼마 멀지 않은 것 같아, 1시간 뒤에 보기로 했다.

나는 드디어 프로이트의 의자를 볼 수 있을 것 같아 들뜬 마음으로 나섰다. 프로이트는 자기 집에서 환자를 보았다. 그는 환자를 의자에 누이고, 자유연상을 통해 무의식적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그 의자에 많은 환자가 누워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을 고백을 했으니, 정신분석학의 역사에서 가장 기억될 만한 것이 그 의자가 아닐까? 그 의자를 보고 싶었다.

언덕을 둘러싼 대로는 한산했다. 옛날 1998년 비인에 한 번 들른 적이 있다. 그때도 5월이었던 것 같다. 맑은 바람과 영롱한 풀꽃의 색깔이 함께 기억난다. 오후였고 점심을 먹고 피곤해 대로변에 있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때 갑자기 시끄러운 밴드의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차들이 행렬이 지나갔다. 그 차들은 대개 1톤 정도의 트럭이었다. 그 위에 유럽의 온 나라에서 온 밴드들이 악기를 싣고 연주하고 춤추고 노래하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가수 그리고 악사의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머리며 분장은 거리의 바람과 풀꽃과 어울렸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함께 춤추는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저게 뭐지? 비로소 가로등에 써 붙여 놓은 플래카드를 보니 유럽 밴드 페스티벌 정도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 저런 게 자유라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1998년이라면 우리는 IMF 직격탄을 맞아 정권교체를 이루었다는 기쁨조차 잊고 있었을 때였다. 유럽에서 안식년을 보내기는 하지만 심정은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쿵쾅거리며 지나가는 밴드 대열의 행렬에 끼여 나는 온몸에 전율이 도는 듯했다. 88년 서태지가 등장해서 일대 문화혁명을 일으켰을 때 그 흥분이 다시 일어나는 듯했다.

그리고 어느새 20년이 지났다. 그 자유란 다가오는 듯했지만, 다시 사라졌다. 박근혜의 억압적 통치는 박정희 시대 못지않았다. 쿵쾅거리며 지나가던 밴드 행렬의 기억이 지금 모호해져 그때 정말 내가 본 것이 맞던가 하는 의심이 나는 것처럼 우리에게 언제 민주화의 시절이 있었던가 하는 회의가 일어난다. 나는 그때를 기억하면서 대로를 천천히 건너갔다. 사라진 민주주의 시대를 기억하기 힘든 것처럼 이제는 그때가 지금과 마찬가지로 5월이었다는 사실밖에는 흥분과 풀꽃과 바람밖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다. 

2) 프로이트

그런데 프로이트 집을 찾는 데 뜻밖에 오래 시간이 걸렸다. 골목 사이에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바둑판처럼 생긴 골목을 요리조리 도는 데 아무리 찾아도 그 골목은 보이지 않는다. 유럽에서 집을 찾을 때 애먹었던 원인이 이번에도 작용했다.

바로 앞에 있다던 프로이트 집을 찾는데 이미 한 시간을 넘겼다. 간신히 찾았지만 이번에는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핸드폰의 전지가 나갔기 때문이다. 문제는 홍 교수가 나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유럽 한가운데서 나를 기다리면서 초초할 텐데. 마음이 급해서 눈에 보이는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허겁지겁 바람같이 돌아보고 돌아섰다. 아쉬운 마음으로 여기 프로이트 박물관 사진을 싣는다.

▲ 프로이트 박물관   © 이병창

애통한 일이다. 프로이트 집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려 했는데! 나는 원래 인간의 정신에 관심이 많았다. 그 때문에 논문도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가지고 썼다. 이 책은 역사적으로 등장한 인간 정신의 다양한 모습을 분석한 책이니, 인간 심리의 역사를 다룬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많은 문학작품이나 영화, 연극 등을 좋아하는 이유도 이런 것들이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 주는 수단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일찍부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관심을 가졌다. 욕망의 비밀을 알고 싶었다.  

그의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나 자신이 그가 말한 환자 같았다. 신경증 분석을 읽으면 내가 강박증 환자 같고, 나르시시즘 분석을 읽으면 나야말로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 같았다. 분열증을 읽으면 어느덧 내가 자주 비문을 쓰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걱정스러워졌다. 그의 책을 읽으면 마치 나 자신과 대화하는 듯하고, 그의 책을 다 읽으면 나의 질병도 다 치료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프로이트 역시 자기 분석을 많이 시도했다. 그는 근본적으로 이런 자기분석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토로했다. 분석하는 자기가 이미 왜곡되어 있다면 그런 분석은 자기의 왜곡을 반영할 뿐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감추기 위해 자기를 분석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정신분석의가 되려면 그가 먼저 분석을 받아야 한다. 이를 수련분석이라 한다.

나는 우연히 어떤 여성을 만난 적이 있다. 그녀는 정신분석학의 대강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는 어머니의 압박 때문에 신경증적인 경향이 강하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많은 자기 이야기를 내게 털어놓았지만 유독 자기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는 하려 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그쪽으로 가려고 하면 다시 어머니한테 받았던 압박을 털어놓고 눈물 짓는다. 그때 나는 그녀의 말은 사실 다른 것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프로이트는 최초의 정신분석학자이니, 환자에 대한 임상 경험은 많지 않았다. 그의 많은 분석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분석이니, 그의 책 <꿈의 해석>을 읽어보면 자신의 꿈에 대한 많은 분석을 예로 제시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자기 분석을 불신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예외였다.

3) 근친상간적 욕망

프로이트의 자기 분석에 기초해서 프로이트 자신이 환자라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주로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하나는 프로이트의 어머니와 연관된다. 프로이트의 아버지는 만년에 프로이트의 어머니와 재혼했다. 어머니의 나이가 프로이트 아버지의 첫째 아들과 비슷했다니까, 나이 차가 상당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독특한 감정을 지녔던 것 같다. 또 하나는 그의 처제와 관련된 사실이다. 그의 처제는 약혼자 사망 이후 1896년부터 함께 생활했고 부인을 놓아두고 함께 이탈리아 여행을 하기도 했다.

이런 사실들은 프로이트가 일종의 근친상간적 욕망을 가진 것으로 해석되면서 프로이트 이론을 실증하는 예로 거론되기도 하니, 이는 프로이트가 자기 꿈의 분석에서 이미 암시했던 사실이다. 그가 그의 꿈에 대한 명백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모호하게 끝내고 만 것은 자기도 자기가 도착할 결론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증거로 간주하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1895년 <히스테리 연구>를 발표하면서 그의 이론을 세워나가기 시작했다. 그 후 1902년부터 그의 집에서 그의 이론에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일명 수요모임이라 한다. 여기에 후일 유명해진 많은 심리학자들이 참가한다. 이게 1908년 비엔나 정신분석 학회로 발전하고, 이해 오스트리아 남부의 잘쯔부르크에서 국제 학회를 개최함으로써 정신분석학의 시대를 열어나간다.

4) 데인저러스 메소드(dangerous method)

프로이트의 이론 가운데 제일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 이 근친상간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그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해 끝내 프로이트로부터 떨어져 나간 정신분석학자도 많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곧 융이다. 그러나 곧 융은 프로이트과 대립하게 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라 한다. 그는 프로이트의 근친상간적 욕망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대신 그는 인간에게는 원형적인 욕망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융은 많은 종교적 문학적 상징을 이런 원형적 욕망과 관련해 분석했으니, 합리적인 학자에게는 융이 프로이트보다 더 설득력이 있었다. 

가끔 융과 프로이트의 대립을 여인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사비나 슈필라인이라는 여성이다. 그녀 자신이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으며 그녀는 융으로부터 치료를 받다가 융을 사랑하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환자가 의사를 사랑하는 것을 일종의 전이 현상이라 하여 의사가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전이를 수용하면 환자의 병이 더 심각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융은 이 사건을 계기로 갈라지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여인 사비나는 후일 프로이트도 찾아와서 그의 이론도 배웠다. 그녀는 융과 프로이트의 이론을 접목하려 했으며 후일 유명한 아동 정신분석학자가 되었다.

사비나와 융 그리고 프로이트가 연관된 삼각관계를 소재로 영화를 만든 사람이 크로넨버그라는 감독이다. 그 역시 정신분석학을 좋아하면서 사비나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위험한 도구)’가 바로 그 영화인데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상연되었다. 무엇이 위험한 도구일까? 아마 정신분석학이겠지. 그런데 위험하다니 왜? 영화는 이렇게 답하는 것 같다. 전이 현상을 일으키니까.

프로이트를 받아 들이냐 아니냐는 이런 근친상간적 욕망을 인정하느냐 않느냐를 기준으로 한다.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며 받아 들이다면 또 많은 문제가 일어나는 주장이다. 그러나 환자를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한 주장이기도 하다. 받아들일 수도 없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는 것, 이런 것을 철학에서는 물자체라 한다. 이런 물자체 때문에 철학이 먹고 살기도 한다. 이 개념이 철학의 밥줄이라는 말이다.
  
프로이트의 집을 견학하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혹이나 유럽 한복판에서 친구를 잃어버릴까 걱정되어 허겁지겁 스테판 성당으로 되돌아왔다. 핸드폰의 전지가 나가 이미 연락이 끊어진지 오래다. 약속 시간 30분이 지나 도착하니 홍 교수는 보이지 않는다. 혹 돌아다니다 다시 오지 않을까 해서 이번에는 내가 한 시간 정도 더 기다렸다. 그러나 홍교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일단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원래는 함께 저녁을 먹고 호텔로 들어가려 했으나 저녁 먹을 경황이 없다. 그래도 함께 유럽을 돌아다녔는데, 어떻게 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 전철을 타고 돌아와 보니 다행히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오히려 태연하다. 끝까지 기다리지 않았다고 화를 먼저 내놓고 생각해 보니 사실 잘못은 내가 한 거다. 이걸 적반하장이라 하나?

이제 내일은 비엔나에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넘어갈 차례다. 우리는 베네치아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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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3/23 [10:20]  최종편집: ⓒ w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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