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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음악의 도시 비엔나
[연재-58회] 이병창 교수의 유럽철학기행
 
이병창 교수 기사입력  2017/03/15 [07:19]

5월10일 비엔나

1)스테판 성당
아침에 쇤브룬 성과 클림트 빌라를 돌고 왔더니 호텔에 짐을 풀고 점심을 먹자 나른해 진다. 구경꾼은 쉴 자격이 없다. 차를 끌고 시내로 들어가기 힘들 것 같아, 지하철을 타고 들어가기로 했다. 우리는 스테판 성당 역을 찾아 내렸다. 도심 한가운데까지 직행이니 상쾌하다. 

비엔나란 선주민인 켈트족의 말 vindo(빛)과 bonna(도시)의 결합어에서 나왔다고 한다. 비엔나란 곧 빛의 도시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광주와 같은 곳이다. 빛의 고을 광주. 켈트어로 말하자면 비엔나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비엔나는 로마와 게르만의 경계, 서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어 수많은 격돌의 전장이 되었다. 비엔나는 도나우(다뉴브) 강가 낮은 언덕 위에 있고 이 언덕은 과거 사진을 보면 격전지답게 두터운 성벽으로 덮여 있었다. 지금은 성벽이 대부분 철거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 언덕 한 가운데 스테판 성당이 있다.

스테판 성당 앞에 서니 그 위용에 겁이 질린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독특한 용모다. 멀리서 보면 분명 전형적인 중세 고딕 성당인데, 정면의 모양이 어딘가 이상하다. 자세히 보니 이건 중세 초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창문이 작고 벽이 두꺼운 것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대부분 유럽 성당이 로마네스크식에서 13세기를 거치면서 고딕식으로 개축되었으니 혼합 양식은 흔하다. 그런데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정면을 화려한 고딕식으로 개축하는 법인데, 이 성당은 오히려 정면을 고집스럽게 로마네스크식으로 유지하고 있다.

더욱 기를 죽이는 것은 성당의 오른 쪽에 보이는 탑이다. 그 크기가 어마어마해서 거의 바벨탑 정도로 보인다. 왜 저렇게 높은 탑이 필요했을까? 당시 궁금했지만 물어 볼 데도 없어 지나치고 말았다. 최근 다시 찾아보니 이유가 있었다. 비엔나는 수차례 공격을 받았다. 특히 16세기 약 150년간 터키와 대결할 때 비엔나 성이 주요 격전지였다. 이때 저 탑에 올라가 주변을 정찰했다고 한다. 그제야 이 탑을 이렇게 높이 쌓은 이유가 짐작된다. 교회가 이렇게도 쓰일 수 있구나. 하기야 유럽 곳곳의 성당은 군사적 요지에 자리 잡고 있다.

▲ 스테판 성당 정면. 르네쌍스 식이다. 정면 현관 벽에 여러 조각을 집어 넣은게 보인다.     © 이병창

▲ 성당 내부. 고딕식임이 완연하게 드러난다. 천정에 빛을 상징하는 조각품이 걸려있다. 비엔나는 '빛의 도시'라는 뜻이다.     © 이병창

▲ 1847년 그림에서 보이는 비엔나 성당의 탑   © 이병창
▲  성당 벽에 그려진 자   © 이병창

우연히 성당 벽을 돌다 보니, 벽에 자가 그려져 있다. 중세 대부분의 도시는 자기 나름대로 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주로 성당 벽에 그 자를 그려놓고 일종의 기준자로 사용하니, 성당의 용도가 이런 데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런데 왜 이름이 스테판일까? 보통 유럽 성당은 성모 마리아나 베드로를 기념하는 성당이다. 가톨릭의 수호 도시 비엔나에서 왜 스테판일까? 스테판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인물이지만 사도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도의 집사 정도에 해당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유대계이지만 그리스어를 사용하기에 그리스어 사용 주민을 위해 집사로 선택되었다고 한다. 그는 최초의 순교자이다. 그는 유대인으로부터 유대교를 모독한 인물이라고 해서 돌로 처단되었다. 이 처단된 자리에 개종하기 전 바울 즉 사울이 있었다고 한다.

스테판은 가톨릭 쪽보다는 로마 정교회 쪽에서 더 널리 알려져 있으니, 비엔나의 중심 성당이 스테판 성당이라 불리는 이유도 짐작은 간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항가리, 체코 등을 제압하면서 이쪽으로 가톨릭을 전파하기도 했지만 거꾸로 동로마 교회의 전통을 어느 정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문화란 이렇게 뒤섞이면서 발전하는 게 아닐까? 지배자라고 해도 자기만을 고집할 수 없는 게 인간의 역사이다.

2)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서 주로 기억나는 인물은 음악가이다. 신고전주의 음악,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여기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비엔나에 왔으니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찾아가는 것은 마땅한 의무가 아닌가? 홍 교수나 나나 고전음악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둘은 학교시절부터 음치로 유명하다. 홍 교수는 음치이지만 박치는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음치이면서 동시에 박치니, 음악을 즐기는 기본 감각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노래는 음치이며 박치라도 듣는 데는 문제없다는 게 음악을 아는 사람의 주장이다. 정말 그런가? 하기야 나도 좋아하는 음악이 있고 즐기는 음악이 있다. 예를 들어 사라 매클레인의 노래는 내 가슴에 와 닿는다. 인터내셔날의 노래는 지금도 가슴을 뛰게 만든다. 그래도 내가 그 음악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보장은 없다. 음치 박치가 이해하면 얼마나 이해하겠는가?

내 친구 중에는 고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집에 가보면 책보다 많은 시디나 판이 가지런히 꽂혀 있어 부러움을 산다. 나는 심술이 솟아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저들이 즐긴다는 게 약 오르는 것이다. 친구의 즐거움에 재를 뿌리기 위해 나는 이때 즐겨 이란의 혁명가 호메이니 옹의 혁명적 결단을 소개한다.

내가 기억하기로 호메이니 옹은 이란 혁명을 성공시킨 다음 한때 서구 고전음악 금지령을 내렸다. 그 이유가 걸작이다. 서구 고전음악은 사람을 애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현악기가 끊어질 듯 이어지고 건반이 가을 낙엽처럼 춤추는 낭만파 음악을 듣자면 정말 그 말이 적절하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저런 음악을 듣다 그저 죽으면 되지 뭐, 삶이란 게 그런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래도 고전주의 음악은 마지막 끝날 때가 되면 다시 어떤 엄숙한 힘이 되살아난다. 단추를 쥐어뜯어 흐트러진 옷을 다시 여며 입으면서 일어날 때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운명애라는 개념이다. 호메이니 옹은 애상함은 알았지만 이 운명애는 느끼지 못했던 것인가?

그러나 저러나 왜 비엔나가 음악의 도시가 되었던 것인가? 고전주의 음악이 서구 부르주아지의 활기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이태리, 프랑스 이렇게 나가는 게 맞다. 독일은 부르주아 문화에 관한 한 후진국이 아닌가? 더구나 오스트리아, 비엔나는 서서히 목이 졸려 죽어가고 있던 중세 제국이 아닌가? 중세 귀족의 정신을 표현한다는 바로크 음악이라면 몰라도 부르주아 정신을 대변한다는 고전주의 음악이 비엔나에서 싹튼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음악을 통해 표현한 것인가? 마치 독일 철학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정신적으로 발전시킨 것과 같이 말이다. 눈에 보이는 미술, 조각, 소설 등은 현세적이다. 반면 귀로 듣는 음악, 시, 철학 등은 초월적이다. 없는 것을 바라는 염원이 음악, 시, 철학으로 표현된다. 그러면 이런 말을 해도 되겠다. 비엔나에는 부르주아의 빛이 없었다. 그래서 음악으로 빛을 표현했다.  

이런 어려운 문제는 음악의 전문가에게 맡기자. 적어도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집에 가 경의를 표하고 돌아와야 한다. 모차르트의 집은 스테판 성당 바로 옆에 있고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다. 문제는 골목의 수를 세는 게 어렵다. 몇 번 지나쳤다가 마침내 모차르트의 집을 발견했다. 이 집에서 모차르트는 1784-1787년 살았으니 겨우 3년 살았지만 이 시기가 그의 음악의 전성기였다고 한다. 당시 그는 제법 돈을 만질 수 있어서 이때가 제일 잘 살 때라고 한다.

모자르트 집을 나서 우리는 다시 베토벤의 집을 찾았다. 베토벤는 1787년 비엔나에 처음 여행을 왔고 이때 모차르트를 배웠다. 그는 1792년 다시 비엔나로 왔고 그후 고향인 본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비엔나에 머물렀다. 그의 집은 부르그테아터(성내 극장 정도로 번역된다) 주변에 있다. 이 극장에서 베토벤의 작품이 자주 공연되었다고 한다. 역시 비엔나의 도심인 언덕의 서북쪽 끝에 있다. 그의 집을 찾느라고 도심의 언덕을 거의 한 바퀴 돌았다.

▲ 모자르트의 집 현관     © 이병창

▲ 베토벤의 집   © 이병창

▲  비엔나 도심의 한 미술관. 크림트 전시를 알리고 있다.    © 이병창
▲ 페스트 기둥. 1679년 비엔나를 휩쓸었던 페스트가 끝났것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황제가 만들었다. 이 기념물을 만들던 중, 1683년에는 터키의 2차 침공이 있었고 이것 역시 격퇴했으니 이 기념물은 이중적의지를 지니게 되었다. 가운데 기도하는 자가 당시 황제인 레오폴드 5세이다.   © 이병창

그의 생애는 대개 나폴레옹이 독일에 침략해서 패배해 물러나기까지 즉 19세기 초반에 걸쳐있다. 이 시기는 철학자 헤겔이 활동했던 시기이다. 헤겔은 나폴레옹이 1807년 예나 전투에서 승리할 때 그 포격 소리를 들으면서 정신현상학을 썼다고 한다. 포격소리는 베토벤에게서도 나타난다. 그 역시 1809년 비엔나로 쳐들어온 나폴레옹의 대포소리를 피해서 동생의 집에 은거했다고 한다.

헤겔과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헤겔은 나폴레옹을 위해 이성의 간지라는 말을 남겨두었다. 나폴레옹이 개인적 야심은 자유를 향한 이성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베토벤은 1805년 제3심포니 에로이카를 나폴레옹에 바치기 위해 썼다. 그러나 그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의 헌사를 지워버렸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1813년 스페인 전투에서 영국의 웰링턴 장군에게 패배하자 베토벤은 웰링턴의 승리라는 노래를 작곡했다. 누가 더 정확하게 나폴레옹을 이해했는지에 대해 철학자들은 자주 토론을 벌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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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3/15 [07:19]  최종편집: ⓒ w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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