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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에서 '클림트'를 만나다
[연재-57회] 이병창 교수의 유럽기행
 
이병창 교수 기사입력  2017/03/08 [23:16]

5월 10일 빈에서-클림트를 찾아

1) 20세기 초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흔적이 남아 있는 쇤브룬 궁전을 나오면서 나는 착잡한 심정에 빠져 있었다. 이 단정한 신고전주의적인 왕궁 곳곳에 화려한 꽃들이 피어 있었지만 무언가 활기를 느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생명이란 원래 거칠고 게걸스러운 법이 아닌가? 나와 홍 교수는 바로 빈 시내로 들어갈까 하다가 차라리 먼저 호텔에 들러 체크인부터 먼저 하기로 했다. 항상 호텔 찾느라고 애를 많이 먹고 또 초초해 했으니 이번에는 그걸 좀 면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호텔이 마침 쇤 부룬 궁전 인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호텔에 체크인하기에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어디 갈 데 없을까 하고 GPS를 뒤져 이름을 들었을 만한 곳을 찾다 보니 쇤브룬 궁전 바로 인근(3-4킬로 정도 떨어져 있다)에 화가 클림트의 빌라가 있는 것이 아닌가? 사진을 보면 당시 그곳은 교외이고 통나무집처럼 보였는데, 어떻게 이리 가까이 있는 거지? 생각해보니, 쇤부룬 궁전 자체가 당시로는 빈의 교외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뛸 듯이 기뻤고 클림트의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왜, 그 유명한 그림 <키스>와 <황금빛 여인>로 유명한 클림트 말이다. 

나는 차를 몰면서 클림트가 등장했던 20세기 초 오스트리아를 상기했다. 20세기 초 오스트리아는 혼돈 속에 있었다. 중세를 지배했던 신성로마 제국의 잔영이 남아있었지만, 붕괴 직전이었다. 제국이 지배하는 곳곳에서 독립운동이 벌어졌다. 체코의 독립운동은 간신히 틀어막았으나 헝가리의 거센 저항은 막기 힘들었다. 어정쩡한 양보 끝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라는 나라가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정체와 퇴락이 거듭되는 속에서 다른 쪽에는 이웃하는 신흥 국가의 성장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새로 등장하는 부르주아는 불안했다. 여전히 과거 지배 계급인 귀족은 권력을 놓지 않았다. 부르주아는 그들에게 딸을 시집보내고 아무 쓸모도 없는 작위를 가문 위에 얹었다. 이미 새로운 노동 계급이 성장해서 부르주아의 지배에 도전하였으니, 부르주아는 그들 앞에서 서서히 자신감을 잃어갔다.

이런 오스트리아 부르주아에게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나치즘의 운동이다. 나치즘은 오스트리아 부르주아에게 결여된 야만적 파괴성을 가진 듯했다. 오스트리아 부르주아는 나치즘을 지지함으로써 자신도 그런 힘을 가진 듯 착각했다. 나중에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무혈점령하게 된 것도 이런 오스트리아 부르주아의 환상 덕분일 것이다.

또 다른 길은 욕망에 몸을 맡기는 길이다. 사회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세적 억압의 분위기가 지배했으니 욕망은 무의식적인 힘으로 그런 억압적 질서에 도전하고 있었다. 이런 시대 오스트리아에서 프로이트와 같은 정신분석학자가 출현한 것도 결코 이상하지 않다. 원래 학문이란 것도 돈과 환경에 좌우된다. 돈을 많이 퍼 부으면 학문은 성장하기 마련이다. 환경이 좋으면 또 학문이 성장하는데, 오스트리아만큼 정신분석학이 성장하기에 좋은 풍토가 어디 있었으랴? 이미 실질적인 힘은 잃어버렸으면서도 억압의 잔재는 그대로 남아 있었으니 나라의 모든 사람이 정신분석학의 대상이 아니 될 수 없었다. 그들이 정신분석학의 풍부한 자료가 되었고 정신분석학자가 먹고 살만 한 돈을 대주었다. 

2) 클림트 빌라

이런 느끼하고도 질식할 듯 한 분위기 가운데서 출현한 또 하나의 문화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클림트와 에곤 실레가 대변하는 그림들이다. 

홍 교수와 나는 약간 돌기는 하지만 빈의 변두리에 있는 클림트의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의 집은 GPS에 나와 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었으나, 유감스럽게도 문이 닫혀 있었다. 박물관으로 개방하는 것이 아닌 모양인가 아니면 휴관일이라서 그런가, 알 수는 없다. 그의 집은 시골처럼 한적한 마을에 별로 티를 내지 않고 그냥 서 있을 뿐이다. 아주 작은 표지만이 이게 그의 집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곳은 클림트의 고향 지역이다. 이곳이 사진에 나오는 그의 아틀리에였던 것은 틀림없다. 그는 만년인 1911년부터 죽기까지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 크림트의 빌라. 유감스럽게 닫혀있다.   © 이병창

▲ 그림트 빌라의 당시 모습     © 출처 크림트 빌라 홈페이지

▲ 크림트 빌라의 현재 모습   © 출처 크림트 빌라 홈페이지

클림트, 나는 그가 나오는 영화를 두 편 보았다. 하나는 최근 나온 것으로 <황금빛 여인>이라는 그림의 운명과 관련된 영화이다. 이 영화를 보면 이 그림이 나치에 의해 몰수되고, 나치 이후 오스트리아 정부에 귀속되어 전시된다. 그런데 사실 그림의 합법적인 소유주가 나와서, 오스트리아 정부와 소송 끝에 되찾게 된다는 것이다. 이건 좀 엉터리 영화이다.

반면 2006년 라울 루이즈 감독이 만든 영화 <클림트>는 클림트를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 이 영화는 클림트가 파리 전시회에 참가했다가 우연히 당시 유명한 여배우를 만나서 그의 나체를 그리게 된 이야기를 소재로 한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모른다. 영화에서도 클림트가 만난 여배우가 실재 인물인지 아니면 클림트가 환상에 빠진 것인지 잘 구별되지 않도록 만들었다. 현실과 환상 속을 오간다는 이야기는 클림트의 그림 자체의 분위기를 잘 반영한다.

클림트는 보헤미아 출신이며 금 세공사인 아버지로부터 기술을 배웠다. 나중에 빈 예술 공예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주로 벽화를 그렸다. 당시 벽화는 역사적 사실이나 종교적 설화를 주제로 삼았다. 그는 점차 프랑스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표현주의적인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가서 마침내 상징적인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빈의 분리파(정통파와 분리한다는 의미, 프랑스 인상파의 독립전시회 때문에 그런 말이 사용되었다)를 결성하고 주도했다. 그러다가 1894년 정부의 요청으로 빈 대학의 대강당 천장화를 그렸다. 이 그림은 철학, 의학, 법학 등의 학문을 상징적으로 표현했으나 이때 죽음의 이미지와 여인의 누드가 주요 이미지가 되었다. 그의 그림을 보면 프로이트가 욕망을 에로스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이라는 두 대립적 욕망으로 설명했던 것과 놀랍게도 유사하다. 같은 도시에서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둘 사이에 교류가 있었을까? 그건 확인하지 못했다. 적어도 프로이트 책에서 클림트가 언급된 적은 없다. 그렇게도 유사한 성격을 지녔는데도 말이다.   

그 때문에 당시 억압적인 정부는 그의 그림을 포르노그래피로 비난하면서 그림을 돈 주고 사놓고서는 창고에 처박아 넣었다. 이 그림은 나치 시대 돌격대들이 파괴했다고 한다. 1907년 그가 그린 아델레 불로흐 바우어라는 여인의 초상화가 황금빛 여인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림이다. 이 그림은 나치가 몰수해서 소위 나치가 개최한 퇴폐미술 전시회에 전시되었던 그림이다. 이 그림이 전후 오스트리아 정부에 귀속되었다. 그걸 여인의 후손이 되찾으려고 시도한 이야기가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3) 개체냐 힘이냐?

상징화란 문화를 모르는 사람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상징이란 문화적 맥락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클림트의 그림이 상징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아니 거꾸로 그런 추상적인 주제를 어떻게 그런 이미지로 그릴 수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나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이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그의 그림 속에 금가루가 섞인 물감으로 그린 문양 때문이다.

황금색 자체가 가진 이미지도 있다. 하지만 더 관심을 끄는 것은 이 문양이 그려진 방식이다. 클림트의 그림을 보면 황금 문양들이 인물의 옷에서 시작해서 인물을 둘러싼 배경으로 흘러간다. 마치 인물과 배경 사이에 아무런 구별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클림트는 우리보고 오히려 거꾸로 생각하라고 촉구하는 듯하다.

우리는 흔히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이 여러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색깔이란 어떤 인물의 옷의 한 속성에 불과하다. 그러나 클림트의 그림을 보면 어쩌면 색깔이라는 것이 그 자체 살아 있는 것이며 스스로 너울을 그리면서 우주 공간으로 펼쳐지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상이란 그런 색깔의 너울이 펼쳐지다가 다른 너울과 만나는 교차점에 불고한 것처럼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든다. 즉 어쩌면 인물이나 벽과 같은 대상은 아무런 차별이 없는 것이 아닐까? 존재하는 것은 다만 이런 대상들을 넘나들면서 파문처럼 번져나가는 저 황금빛 색깔 자체가 아닌가?

클림트의 그림은 포르노그래피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런 경향을 이어받은 것이 그의 제자라 할 수 있는 에곤 실레의 그림일 것이다. 에곤 쉴레가 그린 여인의 비틀어진 몸은 에로스와 죽음이 어떻게 뒤섞이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비틀어진 몸은 다시 현대 영국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남자의 긴장된 근육으로 이어진다. 클림트와 에곤 쉴레, 베이컨으로 이어지는 이 흐름 역시 욕망의 거대한 너울이 흘러가면서 만들어낸 한 매듭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클림트의 그림을 보면 이상한 기운이 위를 휩쓸어가는 듯하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빌라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인터넷으로 소개된 것에 따르면 그 빌라 안에는 그의 여러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그의 그림을 화첩이아니라 직접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언젠가 고갱의 그림을 직접 본 적이 있다. 화첩에서는 도저히 느껴지지 않던 섹슈얼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가 그림을 직접 보니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클림트의 그림도 직접 본다면 또 다른 느낌을 줄지 모른다.

그는 많은 모델과 염문을 뿌렸으며 그의 부인과 함께 낳은 아이만 해도 14명이라 하니, 아마 다른 여인이 낳은 아이도 다 자기가 데려온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일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감기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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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3/08 [23:16]  최종편집: ⓒ w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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