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사회·문화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비엔나의 쇤부른 궁전
[연재-56회] 이병창 교수의 유럽기행
 
이병창 교수 기사입력  2017/02/22 [10:14]

5월 10일 유럽기행.  아, 비에엔나여, 한반도여

1)쇤부른 궁전

 체코를 벗어나자 우리는 곧 비엔나에 도착했다. 호텔에 체크인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기에 우리는 비엔나가 자랑하는 쇤부룬 궁전을 찾았다. 규모로 본다면 베르사이유 궁전에 못지 않지만, 신고전주의적인 양식으로 선비적인 기품이 서려 있다. 이런 느낌은 금박으로 뒤덮인 화려한 베르사이유 궁전이나 우아한 로코코 식의 드레스덴 궁전과는 판이한 느낌이다.

▲ 비엔나의 쇤부른 궁전     © 이병창

우리는 궁전에 다가갔지만 궁전 안으로 들어가기는 싫었다. 유럽의 궁전은 유럽의 성당처럼 그게 그거니까. 틀림없이 화려한 의자와 침대가 있을 것이고, 르네상스 시대 또는 바로크 시대 숱한 그림들이 걸려 있을 것이고, 군데군데 중국제 분청 도자기가 놓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정원이 여행객에게 나른함을 선사할 것이다. 들어가 보지도 않고 미리 선입견을 가지는 것도 문제는 있지만, 그저 궁전 앞에 가보았다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런데 비엔나에서 어떻게 이런 선비의 기품과 같은 느낌이 나오는 것일까?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면서(나폴레옹이 1806년 전쟁으로 해체시킴) 그리고 그 후 잔존한 오스트리아 항가리 제국까지도 몰락하면서 그 수도인 비엔나는 몰락과 퇴폐의 느낌을 간직한 도시로 알려졌지 않았는가? 이런 느낌은 20세기 초에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 등의 죽음과 섹슈얼리티를 드러내는 미술로 표현된다고 하는데, 쇤부른 궁전은 이런 선입견과는 영 딴판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기 직전 짧은 시기 동안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낭만적 음악이 출현하기도 했으니, 쇤부룬 궁전은 아마도 그 시기의 산물일 것이다. 사실 이 궁전을 짓고 가꾼 장본인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이다. 그녀는 1717년 태어나서 1780년 죽었고 오스트리아의 여왕이 된 것은 1740년이니, 그 통치 시대는 프랑스 혁명 직전의 시기와 일치한다. 그 시기가 유럽에서는 신고전주의 양식이 지배할 때였다.
이 시기 오스트리아의 운명은 그녀의 삶과 직결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성로마제국(당시 오스트리아 왕이 세습했다)의 황제인 찰스6세의 딸이었지만 남자 계승자가 없어, 오스트리아 왕국(정확하게는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왕국이다)을 계승했다. 하지만 여자는 안 된다는 규정상 제국의 황제가 될 수는 없었다.

2)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제국은 유럽으로 쳐들어온 오스만터키와의 17세기까지 연이은 싸움으로 국력을 고갈했다. 유럽 신흥국의 성장을 막느라고 이리저리 전쟁을 벌이는 통에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근대적 산업화가 늦어지면서 새로운 국력을 쌓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그녀가 스스로 회고한 대로 그녀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돈도, 신용도, 군대도, 경험과 지식도, 충고자도 없었다.” 이미 신성로마제국과 경쟁하던 신흥제국이 제국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프랑스, 프러시아, 바바리아 왕국들은 그녀의 계승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전쟁을 일으켰다.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그리고 이어지는 7년 전쟁에서 그녀는 간신히 왕위를 지킬 수 있었다.

그녀는 열강의 간섭 때문에 결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열강의 간섭으로 약혼과 파혼을 거듭했다, 그녀는 간신히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 로렌의 백작 프란시스 스테판과 결혼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황제 자리를 맡기고, 오스트리아의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지만 오스트리아 시민들은 그 남편을 싫어했고, 제국은 이미 유명무실했다.

남편은 그녀를 무시하고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고 그녀는 이 남편의 사랑을 애타게 바랬지만 얻을 수는 없었다. 1765년 남편이 사망하자, 그녀는 그 후 평생 검은 옷을 입고, 연회에 참석하지 않고 남편을 애도하면서 보냈다. 매년 8월, 그리고 매월 18일은 자기 침실을 나오지 않고 남편에 대한 추모에 전념했다.

남편이 죽은 후 이번에는 자기 아들 요셉에게 황제를 맡기고 또 다시 오스트리아의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다. 하지만 권력은 어머니와 아들의 사이조차 갈라놓았다. 엄숙한 종교적 어머니와 화려한 궁전의 삶을 즐기려는 아들, 그래도 중세적인 정의를 지키려는 어머니와 이미 마키아벨리적 권력욕에 눈뜬 근대적 아들 사이에 갈등은 거의 선을 넘고 있었다. 아들은 프러시아와 러시아와 더불어 폴란드를 분할하려 했다. 어머니는 반대했다. 그래도 폴란드의 자주권을 인정하려 했다. 결국 현실에 지고 말았으니 1780년 이 이상한 운명의 여왕은 수두에 걸려 제대로 치료를 못 받고 사망하고 말았다.

거대한 권력을 넘겨받았지만 세상의 행복과는 담을 쌓은 여인, 바로 그녀가 지은 궁전이 이 쇤부룬이다. 쇤부룬(Schoenbrunn)이라? 혹 독일어로 '쇠네 부룬넨(schoene Brunnen)'의 준말이 아닐까, 아름다운 우물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녀는 차갑고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샘을 찾고 싶었으리라. 기울어진 나라야 그녀의 능력 바깥의 문제이다. 대신 이 단아한 궁전만은 남겨 두었다.

3)비엔나와 한반도

 비엔나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항상 외부적인 힘이었다. 비엔나가 성장하게 된 것도 몰락하게 된 것도 다 이 외부적 힘이니, 비엔나가 유럽에서 차지한 위치가 그런 운명을 결정했다.

지도를 펴서 비엔나를 보면, 비엔나는 유럽을 상하로 나누는 다뉴브 강의 길목에 위치한다. 이 다뉴브 강이 바로 로마가 게르만을 막는 방어선이었다. 비엔나는 원래 켈트족 거주지였으나 기원전 15년 게르만족의 남하에서 켈트 족을 보호하기 위해 로마가 성채를 세운 이후 이 성채로부터 발전했다. 중세가 되면 비엔나는 다뉴브 강을 통한 교역과 유럽 남북을 잇는 길목으로 교통과 상업의 요지가 되니, 비엔나의 발전은 그 덕분이다.

그런데 지형을 다시 한 번 잘 보면, 비엔나는 유라시아의 유목민이 유럽으로 쳐들어오는 동서의 길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항가리 분지 위로 거대한 카르파디아 산맥이 있고, 밑으로는 알프스 산맥이 가로막고 있으니 유목민이 유럽으로 쳐들어오려면 두 산맥이 열린 틈새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 바로 그 틈새에 그리고 다뉴브 강을 건너는 길목에 비엔나가 있으니, 비엔나는 결국 유럽에 침입하는 아시아 유목민과 유럽과의 대결이 벌어지는 전쟁터가 되었다.

이미 5세기 아틸라가 훈 족을 이끌고 비엔나를 짓밟고 유럽으로 들어갔다. 10세기에는 마자르 족이 침투해 왔으니, 동프랑크의 오토 1세가 승리 이후 마자르 족을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이 승리로 오토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었다. 유럽을 구했다는 의미이다). 이때부터 비엔나는 유럽의 동쪽의 변경에서 유목민을 막는 관문이 되었다. 이 ‘동쪽의 변경’이라는 말이 오스트리아라는 지명으로 되었다. 지금도 독일 쪽에서는 이 나라를 외스터라이히(Oesterreich; 동쪽 지역)라 부른다.

1156년 오스트리아 공국이 세워지고, 1282년 이 지역을 합스부르크 가가 장악하면서 오스트리아 왕국으로 발전한다. 이 왕국이 신성로마제국까지 세습하면서 16세기에는 보헤미아와 항가리까지 지배하고, 18세기에는 스페인까지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을 이룬다. 오스트리아가 이렇게 팽창할 수 있는 이유는 곧 비엔나가 유럽의 남북과 동서를 가로막는 길목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꾸로 16세기에 이르면 오스만 터키가 유럽으로 침입해 들어오자, 두 차례 유럽과 아시아 두 세계의 운명이 걸린 대전이 벌어졌으니, 그것이 바로 1529년 비엔나 전투와 1683년 비엔나 전투이다. 그리고 1738년 또 한 번의 터키의 침입이다. 이 수 차례 세기의 전투에서 비엔나는 유럽의 보루가 되었다. 하지만 누구의 승리도 아닌 그 싸움의 결과, 비엔나는 교역의 중심지에서 적의 침투를 막는 요새지로 변했으니, 도시는 점차 활력을 잃어가게 되었다. 비엔나가 유럽을 막아주는 동안, 유럽은 해상을 통해 전 세계로 뻗어나갔으니, 대체 누구 좋은 일을 한 것일까?

오스트리아의 운명을 생각하면 어쩌면 신통하게도 우리의 역사와 닮았는지 모르겠다. 한반도 역시 중원과 북방 세력의 쟁투의 길목에 있었다. 근대에 이르면 다시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 사이의 쟁투의 길목에 있으니, 중원과 북방, 대륙과 해방의 길목에서 어쩌면 문화와 문명이 교차되는 이점을 살리면 번영의 중심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세력과 세력이 대립하는 요새지가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고역은 우리가 맡고, 돈은 왕서방과 양키가 버니, 비엔나를 보면 우리의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 여행객으로서 동병상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7/02/22 [10:14]  최종편집: ⓒ wngo
저작권자(c)한국엔지오신문.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
이병창 교수의 유럽기행. 비엔나. 쇤부른 궁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관련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