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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에 이미 차가 있거늘(吾心之茶) ‘한재당(寒齋堂)’
 
정진해 문화재 전문위원 기사입력  2017/02/16 [13:31]

문화재 : 한재당(경기도 기념물 제47호)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산76-1번지
 

▲ 한재당 전경     © 정진해

김포 하성면 소재지에서 옛 조강 하구 조강포가 있었던 곳 못 가서 김포 애기봉을 향하는 삼거리가 있다. 이곳에서 애기봉으로 가는 길을 가다 보면 좌측에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 안쪽의 외삼문을 열고 들어서면 내삼문이 보이고 그 안쪽에 정간사라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것이 한재 이목 선생의 사당이다.

▲ 한재당 홍살문     ©정진해
 
김포구 하성면 가곡리에 위치하고 있는 사당은 조선 연산군 때의 학자이자 문신인 한재 이목(李穆:1471~1498)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선생은 조선 성종 2년(1471) 7월 이곳 가금리에서 출생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로 인해 세상을 떠난 조선 초기의 다인(茶人)이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19세(성종 20년:1489년)에 진사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문하였고, 윤필상의 모함으로 공주에 유배당했다. 21세에 유배에서 풀려나자 24세에 중국 연경에 유학을 떠났다. 25세 때인 연산군 1년(1495)에 대과에서 천도책(天道策)과 등용인재책문(登庸人才策問)으로 장원급제하였다.

정 6품의 성균관 전적과 종학사회를 제수 받았으며, 26세에 진용교위의 영안남도(함경남도) 병마평사로 부임했으나 28세가 되던 해 연산군 4년 윤필상, 유자광, 이극돈 등 훈구파가 성종실록 사초의 오의제문을 구실로 김종직 학파인 사림파를 모함하여 많은 선비들이 처형 또는 유배당한 무오사화(1498년)에 연루되어 이때 처형되었다. 이목 선생은 체포되는 그 순간 북쪽을 향해 네 번 절을 올리고, 문초받는 국문장으로 가면서도 ‘절명가(絶命歌)’를 지어 부르며 조금도 눈빛이 흔들림 없었다고 전한다.

  
‘黑鴉之集處分 白鷗兮莫 適彼鴉之怒兮 諒汝色之白歟 淸江濯濯之身兮 惟慮(恐)染彼之血 掩卷而推窓兮 淸江白鷗浮 偶爾唾涎兮 漬濡乎白鷗背 白鷗兮莫怒 汚彼世人而唾也’

검은 까마귀 모이는 곳에/흰 갈매기야 가지 마라/성난 까마귀 만나면/너의 흰색을 시샘하나니/맑은 강물에 깨끗이 씻은 몸/더러운 피로 물들까 염려로다/책을 덮어놓고 창문을 열고 보니/맑은 강물에 흰 갈매기가 노는구나. /우연히 침을 뱉다가/흰 갈매기 등에 묻어버렸네/흰 갈매기야 성내지 마라./세상 사람이 더러워서 침을 뱉었노라.

 
그 후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관을 쪼개어 시신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나 중종이 등극하면서 죄명이 벗겨지고 관직이 복직되고 가산도 환급받았다. 명종 7년(1552)에는 종 2품인 가산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 제학,  예문관 제학, 동지 춘추관 성균관사를 증직 받았고, 명종 14년(1559)에 공주 공암의 충현서원에 배향되었다. 인조 때 김상현이 묘표문을 짓고, 장유가 묘지명을 지었으며, 숙종 43년(1717)에는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세자 좌빈객, 오위도 총부 도총관 등 정 2품의 관직을 추증받았다. 경종  때는 ‘정간(貞簡)’ 시호가 내려지고 영조 때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이 내려졌고 황간서원에 배향되었다.

이와 같이 이목 선생은 짧은 생을 마감하였지만 훗날 그의 효우충직한 성품과 불의에 굽힐 줄 모르는 강직한 기품, 깊은 학문과 굳건한 절의를 가진 인물임을 알게 되었고, 그의 도학과 문장을 겸비한 선비였음을 알리기 위해 그가 가질 수 있는 관직을 추증하였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학문이 더욱 빛나게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그의 문하에 제자도 없어 학문을 계승 선양하는 길이 없었다.

이목 선생이 영안남도 병마평사로 부임해 있다가 27세에 휴가를 하사 받아 호당에서 사가독서를 했을 때 차를 기호품으로 애용해 우리나라 최초의 차 관련 문장인 「다부(茶賦)」가 선생의 문집 <이평사집(李評事集)>에 수록되었다. 이평사집은 이목 선생의 글을 모은 문집으로 선조 18년(1585)에 선생의 아들 감사공 세장(世璋)이 수습하고, 손자 무송현감 이철(李鐵)이 2권 1 책으로 간행하였다.
이 문집이 오랫동안 서고에서 잠을 자다가 1980년에 한국정신문화원장을 지낸 류승국 박사에 의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차 관련 문장인  「다부(茶賻)」가 선생의 저서에서 발견되어 재조명하게 되었다. 이 책이 발견되기 전까지만 하여도 우리나라 차문화의 중심은 조선 후기에서 머물렀다. “是亦吾心之茶又何必求乎彼耶 내 마음속에 이미 차가 있거늘 어찌 다른 곳에서 또 이를 구하려 하겠는가.”는 선생의 오심지다(吾心之茶·내 마음의 차)의 한 구절이다.

차(茶)에 대한 전문자료는 그동안 1830년대 저술한 초의선사의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이었다. 그러나 이목 선생의 이평사집이 발견되면서 한국 차(茶)의 역사를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가야시대, 삼국시대,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차 문화가 이어져 내려오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다인들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김종직 선생과 이목 선생의 사제간 차(茶) 만남,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간의 차 만남, 아암 혜장선사와 다산 정약용 선생과의 차 만남, 초의선사와 김정희 선생의 벗과의 차 만남이다. 이 만남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차 만남의 역사를 정착시킨 아름다운 사건이다.

이목 선생이 차에 대한 관심과 인연은 집안의 제사에 차를 올린데서 찾을 수 있다. ‘철갱봉차(撤羹奉茶)’라고 하였다. 이것은 술 대신 차를 올렸다는 의미이다. 스승 김종직 선생의 제자로 스승과 제자 사이의 차를 마시고, 성균관에서 사신을 알현하며 차를 접하고, 중국 명나라 연경에서의 유학 때 중국차를 접하고, 차 관련 전문 서적에서 차 관련 많은 관심과 안목을 넓히고, 차를 즐기는 차인과의 만남으로 진정한 차인으로써 자리매김하지 않았나 한다.
차의 이름과 종류, 차의 주요 산지, 차나무가 자라는 환경, 차의 삼품, 차의 7가지 효능, 차의 5가지 공, 차의 7가지 덕, 마지막으로 내 마음의 차에 대해 일러주고 있다. 특히 차의 여섯 가지 덕이 있다고 기술하였는데, 사람들을 장수하게 하고, 사람의 병을 낫게 하고, 사람들의 기운을 맑아지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사람들을 신령스럽게 하고, 사람들을 예의롭게 하는 것이 차에 여섯 덕이 있다고 하였다.
이목 선생의 차 정신은 차의 성품을 찬양하고 차의 공덕과 특성을 살려내는 것이고 차와 차인이 하나가 되어 즐기는 다심일여의 경지로서 귀결되며, 바람직한 차와 차인의 관계, 차인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선생의 다부 끝맺음은 ‘오심지다(吾心之茶)’인 “내 마음 차”로 귀결되고 이를 통해 내 밖의 차가 이윽고 내게로 와 나 자신과 하나가 되는 다심일여(茶心一如)의 경지로 나아가야 함을 적시해 준다.

▲ 한재당 외삼문     © 정진해

연산군 4년(1498)년에 사형에 처해져 약 350여 년이 지난 조선 헌종 14년(1848)에 처음 이곳에 사당이 건립되었다. 1970년에 사당을 중수할 때는 일주문이 있었으나 수리과정에서 전형적인 사당 출입문인 솟을대문 형식의 삼문으로 바뀌었다. 이 당시의 사당의 삼문은 사고석 담이 둘러지고 일주문 삼문이 중앙에 놓이고, 문의 좌우는 낮고 중간문은 높았다. 중간문의 평판에 검은색 바탕에 흰 글씨로 정간문(貞簡門)이라 현판을 달았고 홍살을 설치하지 않았다.
삼문의 판문 중간에는 검정색과 흰색을 이용하여 태극문을 그렸으며, 문을 오르는 계단은 2단이었다. 또한 문의 단청은 짙은 갈색으로 도포하였다. 사당인 정간사(貞簡祠)는 높은 기단 위에 지금과 같은 사당건물이 있었으나 앞 오르는 계단은 사당 좌우의 기단 넓이의 일자형 계단 7단을 만들과 3 등분하여 소맷돌로 구분하였다. 또한 기둥을 제외한 창방, 장여, 도리에는 모로단청을 하고 건물의 좌우에는 풍판을 달았다.
그러나 1995년에 대대적인 정비로 홍살문, 외삼문 외삼문, 사당을 차례로 많은 변화를 주었다. 영역의 시작인 홍살문을 도로와 인접하게 세웠는데, 홍살은 좌우의 살이 삼지창을 향해 수평으로 세웠고, 삼지창은 좌우의 창은 짧고 중간 창은 길다. 외삼문은 자연석으로 1단의 기단을 올리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솟을대문 형식의 삼문을 두고 지붕은 맞배지붕을 하고 중안 문의 지붕은 좌우의 지붕에 비해 높게 하였다. 각 문의 중앙에는 태극문을 그렸고, 문 좌우로 사당영역을 표시한 화방벽을 둘렀고, 문의 우측에는 별도로 출입하는 협문을 두었다.

▲ 한재당 신도와 내삼문    © 정진해

외삼문에서 내삼문까지는 박석을 깔아 신도를 마련하였다. 내삼문 앞에 이르면 4단의 계단을 두었고 내삼문도 외삼문과 같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솟을대문 형식의 삼문을 두었고 좌우의 문(출입문) 지붕 용마루는 중간문(신문)을 방향으로 휘어지는 형태로 하였고 신문은 좌우의 문에 비해 높다. 기둥과 문은 붉은색으로 단청을 하고 나머지 부분은 녹색 바탕에 긋기단청을 하였다. 문의 중앙에는 청색과 붉은색으로 태극문을 그렸다. 출입문을 좌우에는 기존의 사고석 담장을 화방벽 담으로 다시 하였고, 사당 뒤쪽의 작은 협문이 제례 공간 바깥에 있던 것을 제례 공간 안으로 넣고 문 바깥으로 담을 둘렀다.

▲ 한재당 정간사(사당)     © 정진해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간사(사당)에 이르기까지는 다듬어진 들을 깔고 삼도가 있던 계단은 다듬은 돌로 자우에 계단을 두었다. 다듬은 돌로 4단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다시 1간을 기단을 올리고 맞배지붕의 사당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구조에 기둥은 가칠 단청을 하고 위쪽으로는 화려한 모로단청을 하였다.

▲ 한재당 한재다정     © 정진해

건물의 우측에는 묘소로 올라가는 계단을 두고 출입을 할 수 있는 협문을 배치하였다. 내삼문을 나서면서 우측 편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트인 사모 지붕의 ‘한재다정(寒齋茶亭)’이 자리하고 있고, 바로 아래에는 연지가 있다. 한재다정은 차를 마시며 쉴 수 있는 공간이며, 정자 옆에는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목 선생의 「다부」를 높이 평가하여 다부(茶父) 또는 다선(茶仙)이라 추앙하고 해마다 기일인 음력 7월 26일에는 선생에게 차를 올리는 헌다례(獻茶禮) 행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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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2/16 [13:31]  최종편집: ⓒ w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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