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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따라 만나는 승탑 이야기 (2)
 
정진해 문화재 전문위원 기사입력  2017/02/06 [09:16]

문화재 : 연천군심원사지부도군(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8호)
소재지 : 경기 연천군 신서면 동내로970번길 32-268 (내산리)


▲ 불명승탑     © 정진해

둘째단 첫 번째 승탑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다. 원형의 지대석 위에 덩그러니 얹어있는 승탑은 종 모양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유형이다. 원기둥의 돌을 위쪽에서 약간 안쪽으로 들어가게 하고 그 위에 돌대를 두르고 다시 둥근 보주를 표현하였다.

▲ 불명승탑     © 정진해

둘째 승탑도 이곳 승탑 중에 가장 복잡한 구조를 가졌다.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 심학사에서 높은 위치에 있었던 승려가 아닌가 생각된다. 기단석부분과 지붕돌은 팔각을 이루고 있으나, 탑신 받침석과 탑신은 원형을 이루고 있다. 하대석은 팔각을 이루고 약간 경사지게 하여 복련을 새겼고, 중대석의 각 면에는 안상을 새기고 안쪽에 8엽의 화문을 음각하였다. 상대석은 앙련을 둘렀으며, 탑신의 받침석은 이등분하여 허리를 만들고 아랫부분과 윗부분에 각각 복련과 앙련을 새겼다. 탑신은 원형으로 아무런 조식과 당호가 새겨져 있지 않으며, 지붕돌의 경사는 완만하며 내림마루를 두었으나 모임부분 이상을 없어진 상태이다.

▲ 불명승탑(왼쪽 세 번째 승탑, 오른쪽 네 번째 승탑)     © 정진해

셋째 승탑도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승탑을 구성하는 부재가 없어지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을 수습한 것 같다. 팔각의 지대석 위에 원형의 탑신과 팔각의 지붕돌이 얹어 있으며, 상륜부는 파손되어 있다. 네 번째 승탑도 마찬가지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으며, 3단으로 쌓은 부재는 제각각 다른 것으로 승탑으로써의 면모를 갖추지 않았다.

▲ 연월당부도     © 정진해

다섯 번째 승탑은 연월당 승탑이다. 연월당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으며, 승탑의 부재는 각각 다른 것을 조합해 놓았다. 지대석 사각형이고 그 위에 기단석은 팔각형으로 각 면에 화문을 새겼고, 탑신은 긴 타원형으로 전면에 ‘蓮月堂’이라 당호가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팔각형으로 내림마루에 비해 지붕돌이 많이 패여 있으며, 모임부분 위로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두 번째, 세 번째, 다섯 번째 승탑 앞에 있는 각각의 승탑은 탑신 또는 일부 부재만 남아 있어 정확한 형태를 확인할 수 없다.

▲ 취운당대사비     © 정진해

3단에는 2기의 비석과 1기의 승탑이 배치되어 있으며, 우측의 비는 취운당대사의 탑비이다. 이 비는 효종 3년(1652)에 세워졌는데, 본래 철원군내 심원사지에 있었던 것인데, 19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 연천군 소재로 되었다. 월두형의 비신을 세운 비좌원수형으로 대석은 자연암석위에 비신을 세우고 시멘트로 고정 시켰으나 시멘트의 이탈로 한쪽으로 기우러져 있다. 비석의 전면에는 5개의 탄흔이 남아 있다.
취운당 학인(1575~1621년)은 임제종의 선사로 본관이 강화로 속성은 손씨이고 이름은 학린(學璘)이다.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 청연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청연의 신임을 받았으며, 명산을 두루 다니다 보개산 심원사에서 16년 머물다가 입적하였다. 비문의 찬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며 학자로 홍문관제학을 지낸 동명 정두경, 書자와 篆자는 동사 윤순거, 세운사람은 그의 제자 흥위이다. 
비문에는 찬자 정두경이 비문을 찬하게 된 이유와 취운당대사의 출가 수학 입적 다비시 사리가 나와 부도탑에 안치한 과정이 소개되어 있다. 뒷면에는 시주자 명단이 나열되어 있다.

▲ 제월당대사비     © 정진해

또 한 기의 비는 제월당 경헌(敬軒)대사의 비이다. 경은은 조선 중기의 승려 승병장으로 본관은 장흥, 속성은 조(曺), 법호는 순명, 당호는 제월당이며, 경헌은 법명이다. 15세 때 출가하여 천관사에서 옥주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지리산의 현운을 찾아가서 경·율·논 삼장의 교리를 통달하였고, 다시 희사와 열사의 지도를 받아 달통한 경지에 이르렀다.
1576년(선조 9) 묘향산으로 가서 휴정(休靜)에게서 선종의 밀지를 받았으며, 1578년(선조 11) 봄부터 금강산 내원동에서 수행하는 한편, 후학들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좌영장의 임명 사령서인 직첩을 내렸으나 사양하였으며, 의병에 참여하라는 휴정의 서신을 받고 진중에 나가 승려의 수행을 이끄는 직책을 맡았다. 그는 전쟁터에서 기도를 하며, 왜군을 격퇴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조정에서는 다시 선교양종판사의 직첩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 뒤 금강산·오대산·치악산·보개산 등 여러 명산을 두루 다녔으며, 그 가운데 금강산을 가장 좋아하여 30여 년간 머물렀다. 1618년 봄 은선동에 암자를 지어 7년간 머물렀고, 1623년 봄 오대산으로 옮겨 많은 제자들을 지도하여 학덕과 선풍이 널리 알려졌다. 1632년 여름 치악산의 영은사로 옮겨 2년을 지내다가 나이 91세, 법랍 76세로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한 뒤 사리 3과를 얻어서 금강산 표훈사와 지제산 천관사, 성오산 향림사 등에 승탑을 세워 안치하였다.
제월당 경헌대사비는 장방형비대석에 비몸, 이수를 갖춘 완벽한 석탑이다. 비대석의 전후방 측면에는 4구획으로 나누고 각각에 면에 안상을 새겼고, 측면에는 2구획으로 나누어 안상을 새겼다. 비대석의 상판에는 초화문을 둘렀다. 몸돌의 상부에는 ‘霽月堂大師碑銘’를 전서체로 , 내용은 해서체로 새겼다. 앞면의 이수는 구름 속에 3개의 발가락을 가진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잡으려고 하며 유영하고 있는 모습이다. 뒷면은 구름 속을 유영하는 한 마리의 용이 화염이 피어나는 여의주를 물려고 한다.

취운당대사비와 제월당 경언대사의 탑비가 있으면 당연히 승탑이 있어야 하나 없어졌거나, 불명승탑 중에 있지 않을까 한다. 두 비 사이에는 주인공을 알 수 없는 종형 승탑이 있다. 이곳 승탑 중에 가장 규모가 크다. 기단부는 원형으로 앙련을 둘렸으며, 탑신과 지붕돌은 한 돌로 이루어 졌으며, 탑신은 아래가 넓으며 위로 갈수록 좁아져 종 형태이다. 지붕돌은 8각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면 모서리에는 둔탁한 내림마루를 표현하였다. 모임 부분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을 두르고 그 위의 상륜부는 일부만 남아 있다. 4단에는 중간지점에 석가여래상이 세워져 있고 좌측에는 박씨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 원심원사지     ©정진해
 
부도군을 보고나서 원심원사로 향했다. 부도군에서 약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보개산을 등지고 자리 잡고 있다. 보개산 심원사는 옛 금강산 유점사의 말사로 석대암, 남암, 지장암, 성주암 등 여러 암자를 관할하던 지장도량의 본산이라 한다. 보개산 등산로를 따라 보개산을 오르면 이들 암자 터를 볼 수 있다.
영원조사에 의해 창건된 심원사는 처음 흥림사로 출발하였다. 강릉 굴산사를 창건한 범일국사가 재창하고 천물을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5년(1396)에 무학왕사가 3창하면서 심원사라 개칭하여 부르게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선조 28년(1592)에 4창을 하였다. 이 시기부터 휴정의 법맥을 이은 소요, 태능, 제월, 경헌, 풍담 등 조선 중기의 선승들과 수많은 학승들이 주석 정진하는 호국불교의 가람으로 형성되어 갔다.
1907년 의병전쟁의 와중에 일제가 소각한 것을 다시 복구 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2005년부터 원심원사로 개칭하여 발굴조사를 거쳐 복원되고 있다. 넓은 경내는 기중기 소리가 들리고 있다. 극락보전을 시작으로 몇 채의 건물이 이미 신축되었고 다시 또 다른 건물을 짓기 위해 터를 닦고 주춧돌을 놓는다.

▲ 학곡리 적석총     © 정진해

마지막 답사지인 학곡리 적석총(경기도 기념물 제212호)으로 향했다. 임진강변은 예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어서 곳곳에 다양한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어 강변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이다. 학곡리적석총은 강변의 많은 돌을 활용했다는 점과 산 또는 들판이 아닌 자연제방위에 돌무지무덤을 만들어다는 것이 매우 특이하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매장시설인 묘곽은 모두 4기가 확인되었다고 하는데 가족무덤이 아닌가 짐작된다.
발굴 당사 이곳에서 경질무문토기와 낙랑계 토기, 유리제 구슬들이 수습되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고구려가 지배하였던 땅이었는데, 이곳에서는 고구려계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아 백제 건국과 관련된 무덤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임진강 강줄기 방향으로 길게 쌓아 있는 적석총은 모나지 않은 강돌을 쌓았다. 상류방향은 더 넓고 높게 쌓았고 하루방향으로 갈수록 좁고 낮게 쌓았다. 전체적인 모습이 도롱뇽이 배를 깔고 엎드려있는 모습이다.
적석총이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돌마돌‘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마을에 마귀할멈이 임진강가에 살면서 매일 치마폭에 돌을 날라 와 이 적석총을 쌓았다고 하여 이 마을 사람들은 이 돌무지를 ‘활짝각담’이라 부르며 신성 시 되어 오고 있다.

저녁 노을진 임진강변의 풍경은 조용히 물소리만 들릴 뿐이다. 집으로 가는 길은 임진강이 함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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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2/06 [09:16]  최종편집: ⓒ w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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