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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서 카프카를 만나다
[연재-55회] 이병창 교수의 유럽기행
 
이병창 교수 기사입력  2017/02/08 [22:59]

유럽 기행 5월 9일 카프카를 만나러

1)보헤미아

 우리는 드레스덴을 떠나 드디어 체코의 땅으로 들어갔다. 체코, 이 지방이 ‘보헤미아’라 불린다. 말 그대로 하자면 ‘보이(Boii) 족의 고향(Heim)’이라는 의미이다. 보이 족은 AD 2-4세기 게르만 족이 남하하기 전 이 지방에 거주했던 켈트 족의 일족이다.

흔히 ‘보헤미안’이라면 떠돌이, 방랑자를 의미하는데, 보이 족이 그런 방랑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 말은 19세기에 와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지만, 사실 오해 때문에 생긴 말이다. 유럽을 떠돌아다닌 집시 족은 여러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원래는 북인도에 거주하던 로마니 족이었는데, 이집트에서 건너왔다는 오해 때문에 ‘집시’ 족이라 불린다. 또 이 집시 족이 보헤미아 지방을 거쳐 왔다는 오해 때문에 ‘보헤미안’이라고 불린다.

오해이기는 하지만 보헤미아로 들어가니 어쩐지 방랑하는 자의 자유가 느껴지는 듯하다. 드레스덴에서 프라하로 들어가는 길목은 울창한 숲이 우거진 산을 하나 넘어서 간다. 이 도로는 국도이고 차선이 2차선이어서 차들이 밀린다. 우리는 창문을 열어 놓고 오월의 녹음이 뿜어내는 짙은 향기를 맡으면서 프라하로 다가갔다. 한국이라면 이때쯤 밤나무 향기가 온 산에 가득할 텐데...

산을 넘자 곧 넓은 고속도로가 펼쳐진다. 막히던 차들도 사라지고 시원스레 열린 고속도로를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질주했다. 예약해둔 호텔은 저녁 늦게 들어가도 문제가 없다고 했다. 아직 시간이 남아서, 우리는 먼저 프라하 시내로 들어가기로 했다. 우리의 목표는 일단 성이다. 그리고 그 성 아래 있다고 하는 카프카의 집이다. 다행히 두 가지가 모두 지피에스에 잡힌다.

하지만 프라하의 구 시가지는 길이 미로처럼 꼬여 있어, 지피에스가 가리키는 방향이 정확히 어느 방향인지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이리저리 헤매기 시작했다. 전차와 경쟁하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뛰어드는 시민에 놀라기도 하면서 프라하 구시가를 맴돌았다. 드디어 프라하의 교통경찰에 붙잡히게 되었다. 경찰의 말은 “우리가 회전 규칙을 어겼다는” 것이다. 아찔했다. 나는 우기기로 했다. 그래서 지피에스를 가리키면서 손짓 발짓으로 말했다. “우리는 관광객인데, 성으로 가려한다. 그런데 지피에스가 이리가라 하더라, 미안하게 되었다. 등등.” 교통경찰이 가련했던 것인지, 우리를 풀어주었다.

2)프라하 성

 이렇게 헤매면서 프라하 시내를 가로지르는 불타바 강을 여러 번 건너서 드디어 언덕 위에 있는 프라하 성에 도달했다. 차는 언덕 밑에 세워두고 걸어서 언덕 위의 성으로 올라갔다.

▲ 프라하 성의 뜰   © 이병창

프라하 성은 9세기 지어졌다. 이 성을 지은 부족은 슬라브 족의 일족인 체코 족이다. 원래 이 지방 선주민인 보이 족이 서진한 이후 2-4 세기 비어 있는 이 지방은 게르만 족의 일족인 마르코마니 족이 거주했다. 이들도 5-6세기 게르만 이동 시기에 지금 이태리 북부 지역으로 내려 간 다음 이 지방을 차지한 것이 체코 족이었다. 이 부족이 8세기 흥기하면서 보헤미아 공국을 건설했다. 9세기 세워진 이 성은 그러므로 보헤미아 공국의 영화를 보여주는 성이라 하겠다.

흥미로운 것은 체코 족은 슬라브 족이면서도 게르만 족하고 주로 놀았다는 것이다. 종교도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임으로써 서구화되었다. 그것은 아시아 쪽에서 훈족에 이어 마자르 족이 서구로 침입하는 길목에 보헤미아 지방이 있었기에, 이를 막기 위해 서쪽의 게르만 족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955년 마자르 족과의 전투에서 게르만 족과 연합하여 승리를 거둔 이후 보헤미아 공국은 일약 유럽의 맹주가 되어 보헤미아 왕국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13세기 독일 이주민이 들어오고(바로 독일 이주민의 집단 거주지가 지금 카프카의 집이 있는 곳이다) 스페인에서 이주한 유태인이 들어오면서 프라하는 상업 및 금융 중심지로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14세기 보헤미아 왕 카를르푸(독일어로는 카를레스) 4세가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될 정도로 보헤미아 왕국은 강력해 졌다. 이 카를루스 4세는 제국의 수도를 프라하로 옮기고, 서구로부터 늘어나는 이주민을 위해 강 건너 신도시를 만들고 구도시(성이 있는 쪽)와 연결하기 위해 ‘카를루프 다리’를 건설했다(신축이 아니라 확장, 재건이라 한다). 프라하 성 옆에 비투스 대성당을 건설했던 것도 그였다. 지금 비투스 성당은 화려한 고딕식 성당으로 이 시기 유럽의 수도 프라하의 영화를 입증하는 것이 틀림없다.

▲ 성 옆에 있는 비투스 성당    © 이병창

하지만 나의 눈에는 그 화려하다는 성이나 성당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프라하의 성이 왜 카프카의 작품 <성>의 모델이 되었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이 성이 작품 <성>에 묘사된 것처럼 모호한 혼돈 속에 있고, 문을 열면 갑자기 전혀 엉뚱한 곳이 나타나거나, 아무리 다가가려고 해도 그저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는 포스트모던한 성이 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유럽의 왕궁에 비하면 소박하게 생긴 왕궁에 불과했다. 프라하 성을 찾으려고 한 시간 이상 헤매었던 프라하의 거리야 말로 오히려 카프카의 <성>에 걸 맞는 모델이 아닐까?

3)카프카

 우리는 곧장 내려와 드디어 프라하에 왔던 목적인 카프카의 집을 찾았다. 카프카의 집은 성을 내려가 불타바 강변으로 다가가니 강변에 직면해 있었다. 카프카의 아버지가 배를 대기 좋은 이 장소에서 소매상을 경영했다고 한다.

▲  다리 위에서 본 불타바 강   © 이병창

이곳은 조금 전 말했듯이 13세기 이래 독일인 및 유태인 이주민의 집단 거주지였다. 카프카는 이디시어를 사용하는 유태인 가계였지만 장사꾼 카프카의 아버지는 독일 이주민이 권력에서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고 카프카에게 독일어를 배우도록 시켰다고 한다. 카프카는 결국 모국어가 독일어가 되었고, 독일어로 작품을 작성했다.

카프카의 전기를 쓴 많은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가 거대하고 이기적이며, 폭압적인 상인이었다고 말한다. 카프카의 <성>의 모호한 혼돈을 지배하는 것은 성주인데, 그는 작품 속에 이 성주는 이름으로만 나오며 주인공은 결코 이 성주를 만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성주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이 모든 혼돈을 지배하고 있다.

카프카의 해석자는 이 ‘성주’가 의미하는 것을 여러 가지로 해석한다. 이 성주는 관료제를 암시한다고 하기도 하고 인간의 운명을 조종하는 신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아마도 이 성주는 자기 아버지를 모델로 했던 것이 아닐까? 카프카의 눈에 전제적 지배자인 그의 아버지는 그가 묘사한 <성>처럼 부조리한 존재일 것이다. 자의적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이 성주 앞에서 그 자신은 그의 소설 <변신>에 나오는 벌레와도 같을 것이다.

▲ 카프카의 박물관    © 이병창

카프카 집은 이제 박물관이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5시가 넘어 문을 닫았다. 아직 기념품을 파는 상점은 열려 있어 나는 유럽에 온 지 기념품으로는 처음으로 몇 가지를 구입했다.

카프카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으나 여러 애인이 있었다. 그는 이런 애인들과 약혼과 파혼을 거듭했는데, 그의 연애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밀레나와의 연애이다. 언젠가 밀레나와 카프카의 연애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카프카가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가 번역되어 있다.

카프카가 밀레나를 만났을 때(1920년) 밀레나는 이미 친구의 부인이었다. 밀레나는 카프카의 독일어 책을 체코어로 번역하면서 가까워졌다. 카프카가 불안에 시달리며 우울한 성격이었다고 한다면 그에 반해 밀레나는 보헤미안적 기질이 다분한 여성이었다. 정열적이었고 돌발적으로 행동했다. 이사도라 덩컨 식의 옷을 입고 다녔으며, 한 밤중에 공동묘지로 소풍을 가거나 옷을 입은 채로 강에 뛰어들기도 했다. 또한 밀레나는 분방한 연애를 벌였으며,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기도 했다. 어떻게 본다면 밀레나는 카프카의 아버지에 대해 대응되는 여성상이 아닐 수 없다.

밀레나는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났으며 카프카의 영혼을 이해했다. 카프카는 죽기 전 그녀에게 자기의 일기를 넘겨줄 정도로 정신적으로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주로 비인에서 만났지만 밀레나가 프라하로 카프카를 만나로 올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밀레나가 이혼하기는 했지만 친구부인이었고, 나이도 13세나 차이 났고, 또 유태인 상인의 아들과 체코 귀족의 딸이라는 사회적 벽도 있었고, 이미 카프카는 폐결핵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밀레나를 만난 지 얼마 후(1924년) 카프카는 비인 근교에서 병으로 죽게 된다. 밀레나 역시 나치의 침략 이후 수용소에서 죽게 된다.

▲ 카프카와 기념사진을 찍다.   © 이병창

카프카의 작품 <성>은 1921-2 사이에 작성되는데(출판은 사후 1925년 그의 친구 막스 브로드에 의해 간행된다고 한다) 이 작품은 밀레나와의 사랑이 밑거름이 되었다고 한다. 작품 속에서 성 관리의 애인이었다가 주인공의 애인으로 되는 프리다가 밀레나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한다.

이 집 앞에서 서니, 멀리 성이 보인다. 카프카도 자기 집에서 프라하 성을 보면서 <성>이라는 작품을 쓴 것이 아닐까? 나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작가 카프카를 기리기 위해 그 집 앞에서 옷을 여미고 홍 교수에게 사진을 하나 찍어달라고 했다.

4)카를르푸 다리

 카프카의 집에서 조금 가면 카를르푸 다리가 나온다. 나는 언젠가 안개 속에 기이한 동상이 세워져 있어 마치 몽환적인 느낌이 드는 카를르푸 사진을 본 적이 있어, 정말 어떤 분위기인가 알고 싶어 카를르푸 다리를 찾았다. 다리 위에 안개는 없었지만 역시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진에서 본 것과 같았다. 아마도 기이한 동상들 때문일 것이다.

▲ 카를르푸 다리   © 이병창

카를르푸 다리 위에 많은 관광객이 있었고 그 틈에는 한국말을 쓰는 젊은이들도 많았다. 중고등학교 학생인 듯 보여서 내가 물었다. “어디서 왔니?” 한국말로 한국말 하는 아이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 게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금방 다시 고쳤다. “어떻게 왔니?” 그렇게 물으니 속으로 또 이상했다. “비행기타고 왔겠지, 걸어왔을까?” 내가 묻고 싶었던 것은 사실 이런 말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그런 나이에 이렇게 멀리 여행을 올 수 있었니?” 어떤 여학생이 나의 물음을 “무슨 단체니?”라는 물음으로 이해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기독교와 관련된 청년 단체인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친구들과 사진을 찍어 달라한다. 근데 사진을 찍으면서 왜 항상 승리의 V자를 그리는지는 잘 모르겠다. 특히 이 몽환적 다리 위에서 V자는 어울리지 않는다.

▲다리 위에서 본 언덕 위 성의 모습. 사진 아래 카프카의 박물관이 표시되어 있다.    © 이병창

카를루프 다리를 보고 난 이후 이제 저녁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예약한 호텔을 찾아 갔다. 호텔은 프라하 중심지에서 멀지 않았지만 느낌상 한적했다. 우리는 여장을 풀어놓고 저녁을 먹기 위해 호텔로부터 걸어내려 왔다. 아직 사회주의 분위기가 남아 있는 것인지, 거리가 한적하기 짝이 없다. 마치 우리나라 어느 읍의 거리를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피곤한 김에 독주를 마시고 잠들었다. 그리고 다시 다음날 아침 이번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를 향해 출발했다. 드레스덴에서 프라하로 오는 길에 비해 비엔나로 가는 길은 훨씬 좋았다. 얼마쯤 달리다 보니, 고속도로 변에 휴게소가 있다. 잠시 차를 세우고 커피를 마시는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휴게소에서 무언가를 사가지고 가는 것이 아닌가? “어제는 고속도로에 비용을 받지 않았는데?” “도로마다 받는 데가 있고 안 받는 데가 있겠지” 홍 교수의 이야기이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니 그 사람들이 사가는 것이 도로 통행증 같았다. 나는 우리나라나 프랑스처럼 여기서도 지나간 거리에 해당하는 만큼 내면 되는 것으로 알았다. 고속도로가 끝나면 톨게이트가 있을 것이고 “거기서 사지 뭐” 이렇게 생각하면서 지나치고 말았다. 그런데 휴게소를 나와 고속도로를 벗어나 비엔나에 다가가는 데도 톨게이트가 보이지 않았다. 속으로 “야, 재수!”, “돈, 벌었네” 생각하는데 웬걸 조금 뒤 경찰차가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차를 세웠다. 그러면서 비네를 보여 달라고 했다.
“비네? 나는 그런 거 모른다.” 그러니 고속도로 통행증으로 비네라는 것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것을 차의 유리창에 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휴게소에서 본 것이 있어 나는 설명했다. “아, 나는 톨게이트에서 사려고 했는데 톨게이트가 안 보이더라. 어딘지 가르쳐 달라?” 여기는 톨게이트가 없고 비네는 거리가 아니라 사용기간 단위로 파는 것이고, 체코에 들어오면 무조건 사거 붙여야 하는 거라고 설명해 준다. 나는 우겼다. “그러면 내가 돌아가서 사가지고 오겠다. 여기서 기다려 달라!”면서 무조건 우겼다. 달리 길도 없으니 우기면 어떻게 되겠지. 결국 우리가 이겼다. 젊은 체코의 경찰은 막무가내 버티는 우리를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현금 요구 대신 그는 벌금영수증을 끊어주면서 은행에 가서 내라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다시 체코에 오면, 낼지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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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2/08 [22:59]  최종편집: ⓒ w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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