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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따라 만나는 승탑 이야기 (1)
 
정진해 문화재 전문위원 기사입력  2017/02/03 [10:44]

문화재 : 오봉사지부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1호)
소재지 : 경기 연천군 연천읍 고문리 산73-2번지


10여 년 전에 연천군에 있는 문화재를 찾아 답사한 때가 있었다. 물론 그 이후로 연천 지역의 문화재를 찾아가는 곳은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숭의전, 경순왕릉, 선사유적지에는 매년 한차례는 답사를 하였다. 문화재를 찾아가는 날이 빈번해지면서 지금은 함께 떠나는 사람도 많아질뿐더러 많은 관심으로 접근하는 모습에 흐뭇한 느낌이 와 닿는다. 문화재 강의를 하면서 문화재의 가치를 전달할 때면 신바람이 날 정도로 열강을 하지만 강의들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느껴오는 문화재는 어느 정도일까 생각도 해 보곤 한다.

연천지역은 선사유적에서부터 시작하여 청동기시대, 삼국시대, 6.25의 아픈 상처까지 남아 있는 시대적 유적의 보고이다. 10여년 전만하여도 문화재가 군부대 영역에 있어서 민간인이 접근하기란 쉽지 않았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문화재에 접근을 해 보았지만 연천지역의 문화재는 더욱 출입통제가 심했다. 해당 문화재 검색을 하면서 사진이 없을 때면 언제쯤 직접 만날 수 있을까 하며 그날을 기다렸다.

전국에 문화재로 지정된 승탑을 찾아다닌 때가 있었다. 엄격한 통제로 볼 수 없었던 사찰의 승탑도 빠짐없이 답사하였고, 이제 군 작전상 통제되었던 문화재를 볼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정확한 위치까지 모두 검색을 끝내고 오봉사로 향했다.


오봉사에 대한 정확한 연혁에 관해 정보가 부족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범우고』, 『가람고』, 『연천읍지』 등의 문헌에서는 사찰의 위치만 밝히고 있을 뿐 구체적인 사실은 알 수 없다. 추측컨대, 『태종실록』(권14, 7년 12월 2일)에서 조선 초기의 사찰 혁파 후 선정된 전국 88개소의 자복사 가운데 오봉사가 연천지역을 대표하는 사찰로 선정되었으며 당시 시흥종에 속했다고 전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일한 내용을 보아 고려 말 또는 조선초기의 사찰로 추정하고 있다. 『봉선사본말사지』 ‘오봉사조’에 1677년에 화주 경열(敬悅)이 사찰을 중수했다는 내용이 새겨진 명문 기와가 수습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토지문제와 관련된 탄원서 내용 가운데 1907년 연천 일대를 크게 혼란케 했던 정미의병사건 이후 사찰의 승려들이 각처로 흩어졌으며. 1917년까지 사람이 살지 않았고, 사찰 소유인 산림과 토지는 다름 사람에게 넘어갔다는 기록이 있어, 이 시기를 전후하여 폐사직전에 놓였음을 집작할 수 있다.

김도현 주지가 이곳에 와서 당우를 보수하고 토지를 되찾는 등 재건에 임했으나 한국 전쟁 중에 전소되다보니 부도에 대한 기록이 더욱 전무하였다. 최근에 건립된 사적비에  ‘傳佛燈托蹟山門五峰大禪師之碑(전불등탁적산문오봉대선사지비)’라는 기록이 있어 오봉대선사의 사리탑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사찰은 1991년부터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지금은 건물 한 동이 완성되어 있는 모습이다.

▲ 오봉사지부도     © 정진해

이정표 방향으로 계곡으로 한참 들어가 징검다리를 건너면 숲 사이로 승탑이 눈에 들어온다. 건물에서 약 200m 정도 떨어진 아늑한 숲속 넓은 공터에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넘어질듯 하면서 서는 오뚝이 형태의 석종형 승탑이다. 한국부도의 전형적인 형태는 통일신라시대의 팔각원당형이지만 이곳의 승탑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석종형에 따른 것이다. 지대석의 두께와 넓이는 알 수 없으나 상면이 각형 한 단의 받침으로 두고 그 위에 한 돌로 이룬 탑신을 올렸다. 탑신과 상륜부의 사이에는 줄 모양의 돌대를 둘러 구분하였다. 탑신의 상부에는 단엽 12판의 복련을 선각하였으며, 보주형의 상륜부에는 단엽 6판의 앙련을 새겨 마치 연꽃이 피기전의 모습처럼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굵은 선으로 돌대와 상륜부의 일부와 탑신이 크고 작은 총탄 자국이 남아 있어 한국전쟁이 이곳에도 전투가 치열했음을 보여준다. 승탑 우측에는 탑비를 세웠던 장방형의 비좌만 남아 있고, 새롭게 마련된 ‘오봉사지부도에 대한 유래비’가 서 있다.

▲ 심원사지부도군     © 정진해

다음 답사지인 <심원사지부도군(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8호)>를 향했다. 지금은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10여 년 전만 하여도 심원자지와 승탑은 일반인 접근이 되지 않았다. 갖은 방법으로 접근 하려고 절차를 밟아 갔었지만 군 작전 지역이므로 일체 민간인 출입이 될 수 없다는 답을 받고 뒤돌아섰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승탑이 어디쯤 있는 것도 알 수 없거니와 몇 기의 승탑이 있는 것도 알 수 없어 항상 볼 수 있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이곳의 옛 심원사는 한말 의병활동의 본거지로 이용되어 왔으나 사찰건물 모두 불에 타 없어진 후 다시 재건하였으나, 인근의 오봉사처럼 한국 전쟁으로 다시 전소되었다. 그 후로는 이곳에는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면서 폐사로지로 남아 있었는데, 군부대의 이전과 함께 본격적인 발굴 활동이 시작되었다. 2003년에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옛 심원사 터임을 밝혀내고 첫 건물인 극락전과 대웅전을 복원하였다. 한국전쟁으로 폐사되면서 철원 동숭읍으로 옮겨가 심원사를 새롭게 창건하였다. 동숭읍에 있는 심원사와 이곳의 원심원사는 고대산과 금학산, 보개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의 동서에 위치하고 있다. 

14기의 승탑과 3기의 비석, 석조 아미타불이 4단에 배치되어 있다. 첫 단에는 5기의 승탑, 둘째 단에는 8기, 셋째 단에는 2기의 비와 1기의 승탑, 넷째 단에는 공덕비와 석조 아미불상 이 배치되었다. 부도전은 심원사 동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1925년 당시 지주였던 홍월운과 법무 이진학의 주도로 현재의 장소로 이전 하였다고 심원사지에 전해지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죄 없는 부도와 비에 총을 겨누어 쏘았기 때문에 파손되었는가 하면 일부는 부재가 서로 바뀌어 원형을 알 수 없는 상태로 자리에 남아 있다.

이곳은 청허당 휴정(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은 승려들의 승탑이 많음을 알 수 있다. 풍담당(楓潭堂)·청하당(靑霞堂)·호연당(浩然堂)·청심당(淸心堂)·제월당(霽月堂)·취운당(翠雲堂) 등이 바로 그 승려들이다.
이곳의 승탑은 8각원당형을 기본으로 하는 것과 종형의 승탑으로 이루어졌으며, 8각 원당형의 승탑의 지붕은 완만한 것과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특징이다.

▲ 불명부도     © 정진해

첫째단의 우측 첫 번째 부도는 누구의 승탑인지 확인이 되지 않으며, 8각의 지대석에 위에 1단의 기단석을 올리고 그 위에 탑신을 올렸다. 기단석의 각 면에는 사각의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는 아무런 문양을 새기지 않았다. 탑신의 받침은 2단을 두었고 그 위에 올려 있는 탑신석은 8면을 두고 아래와 위에는 둥근 모양을 하였다. 정면에는 승탑의 주인이 누구인지 글자를 새겼으나 마모되어 판독이 되지 않는다. 지붕돌 사방의 추녀는 새가 날개를 펴 날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지붕의 경사는 완만하다. 지붕의 모임부 위에는 보주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는 상태이다.

▲ 풍담당부도     © 정진해

두 번째 승탑은 풍담당 승탑이다. 풍담은 조선 선조 25년(1592)에 김포 통진에서 태어나 14세 때 금강산 묘향산의 성순 문하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그 뒤 원철·편양 언기 스님 등에게서 법을 전해 받았으며, 금강산과 보개산에 머물며 제자들을 지도하였다고 전한다. 풍담의 승탑은 이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김포 문수산에도 승탑과 탑비가 있으며 해남 대흥사 부도전에도 승탑이 있다.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지만 특히 김포 문수산과 이곳 보개산의 승탑에 대한 정확한 고증이 있어야할 것 같다. 승탑은 기단석과 탑신, 지붕돌이 모두 8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지대석과 하대석은 땅에 뭍혀 형태를 알 수 없고 중대석은 모서리가 들어가 있으며 각 면에는 사각형의 안상을 새기고 아무런 문양을 새기지 않았다. 상대석은 돌려가며 24판의 복련을 새겼고, 위에는 선을 음각하여 둘렀다. 탑신 받침은 얕은 받침과 높은 받침을 두었으며, 탑신 앞면에는 ‘楓潭’이라는 당호를 새겼다. 지붕돌은 두꺼우며 각 면의 모서리에 내림마루를 양각하고 모임 부분에는 연꽃 8엽을 새겼으며 보주는 없는 상태로 남아 있다.

▲ 청하당부도     © 정진해

세 번째는 청하당 승탑이다. 지대석 및 하대석, 중대석까지 땅속에 있어 그 크기를 알 수 없으며 밖으로 나와 있는 상대석은 8면에 운문을 새겼으며 탑신석 받침은 1단으로 하였다. 8각의 탑신은 정면에 ‘淸虛四世月潭門人靑霞堂大師之塔廟’라고 새겨졌다. 청허당 유정스님의 4대째 제자인 월담스님에게 배운 청하당 스님의 묘탑이라는 의미인 듯하다. 지붕돌은 급경사를 이루고 각 모서리에 내림마루를 새기고 모임 부분에는 복련을 새기고 그 위의 노반은 각 모서리에 기둥을 모각하였고 윗부분은 없어진 상태이다.

▲ 호연당부도     © 정진해

네 번째는 호연당 승탑이다. 지대석은 땅에 묻혀있어 알 수 없어 하대석은 팔각의 각 면에 안상을 새겼고 상대석은 8면에 아무런 조식을 하지 않았다. 탑신은 난형으로 위쪽에 ‘浩然堂’이라는 당호를 새겼다. 지붕돌은 경사가 완만하며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다.

다섯 번째는 청심당 승탑이다. 지대석은 알 수 없으나 하대석과 중대석, 상대석은 한 돌로 이루어졌으며, 8각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하대석은 45도 경사진 상태에서 각 모서리에 기둥을 모각하였고, 중대석도 마찬 가지로 모서리에 기둥을 모각 하였다. 각 면에는 아무런 조식을 하지 않았으며, 상대석은 각 면에 앙련을 한 판씩 새겼다. 탑신은 원형으로 정면에 ‘淸心堂’이라 당호를 새겼다. 지붕돌은 급경사를 이루며 각 모서리에는 모임부분까지 내림마루를 모각하였고, 상륜부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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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2/03 [10:44]  최종편집: ⓒ w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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