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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덴, 아름다운 쯔빙거 궁과 다리파 선언
[연재-54회] 이병창교수의 유럽기행
 
이병창 교수 기사입력  2017/02/01 [22:36]

5월 9일 드레스덴을 향해

1)드레스덴의 기억

 비텐베르크를 떠나 우리는 체코 경계선을 넘기 전에 길목에 있는 드레스덴에 들리기로 했다. 나중에 생각하니 이게 실책이었다. 이 때문에 내가 프라하로 가려 했던 가장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드레스덴은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나는 이 도시를 처음에는 독일 표현주의 미술사 가운데 나오는 ‘다리파’(키르히너 등) 때문에 기억했다. 그리고 내가 독일로 가기 전에 번역했던 <그리스 문학 연구>의 저자 프리드리히 슐레겔 때문에 기억한다.

사람들은 낭만주의 철학자 하면 우선 셸링이 생각나겠지만 그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철학자가 있다. 그가 프리드리히 슐레겔이다. 그의 형이 윌리엄 슐레겔이라 문학사에는 자주 두 사람을 묶어서 슐레겔 형제라고 말해진다. 둘 다 낭만주의 문학 비평가이지만 철학의 차원에서 본다면 형보다는 아우인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더 탁월한 존재이다.

이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대학시절 좀 놀았던 모양이다. 결국 돈이 떨어졌지만 아버지가 화를 낼까 집에도 못가고 드레스덴에 시집갔던 누이를 찾아가 일 년 정도 드레스덴이 머물렀던 적이 있다. 그때 드레스덴 박물관에 수집된 그리스 로마 미술, 조각들을 보고 지었던 책이 내가 번역했던 <그리스 문학 연구>라는 책이다. 그러니 나에게는 이 책의 발상지라고 할 드레스덴에 마땅히 가보아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드레스덴은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독일 역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뭐라 할까 약간 비감이 느껴지는 도시라고 할까? 그런데 그 비감은 허풍을 치던 사람이 결국 패배하는 것을 보고 느끼는 감정이니 그렇게 가슴 아픈 것은 아니고, “거참, 안 됐기는 하다”라는 정도의 느낌이라 하겠다.

드레스덴은 원래 게르만의 한 부족인 작센 족의 중심 도시이다. 작센 족이라면 ‘앵글로 색슨’이라 할 때 그 ‘색슨’을 의미한다. 이 작센 족의 일부가 앵글로 족과 함께(이 두 부족이 선사 시대에는 지금 덴마크 반도 지역에 이웃해서 살았다고 한다) 영국으로 건너가서 원주민인 켈트족을 장악하여 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중세 시대 게르만족이 남하하면서 지금 중부 독일 지역에 혼재했던 작센 족과 튀링기아 족은 13세기 혼합하여 작센 공국을 이루었다. 1423년부터 작센 공국은 베틴 가가 장악했다. 그러다가 1485년 형제간 분할로 튀링기아 지역과 작센 지역이 다시 분할되었다. 그 뒤 튀링기아 지역은 이미 살펴 본 적이 있는 바이마르 공국이 되어 바이마르를 수도로 했다. 반면 작센 지역은 작센 공국이 되었고 그 수도는 드레스덴이었다. 둘 다 영주가 베틴 가에 속했고 개신교를 공인했다는 점에서 문화적으로 가까웠고 루터에서 보듯이 이 지역 대부분의 학자와 예술가는 이 두 지역을 오가며 활동했다.

2)드레스덴의 역사 

 드레스덴이 역사의 화려한 무대에 등장했던 것은 18세기 초이다. 이때 작센 공국 북쪽의 프러시아가 팽창하기 시작하자, 같은 개신교 국가인 작센 공국도 이에 대해 경쟁하기 시작했다. 프러시아가 철저하게 신성로마제국에 대립하면서 군사적 힘으로 주변을 제압해 나갔다면 작센 공국은 신성로마제국의 후원 아래 외교적인 힘을 이용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꼭 하는 짓이 지금 남북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역사가 이렇게 반복되기도 하는 구나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  드레스덴 영주가 거처하던 왕궁   © 이병창

일단 행운의 실패는 작센에게 던져졌다. 작센 공국은 루터를 보호한 인연으로 종교전쟁 이후 신교를 대변하는 독재권을 지녔다. 18세기에 들어가면서 영주인 아우구스트 2세는 거대한 폴란드 리투아니아 왕국을 탐냈다. 당시 폴란드 왕국은 구교 국가이고 귀족의 선거에 의해 왕을 뽑았기에 그는 스스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많은 돈을 풀어 폴란드 귀족을 매수했다. 마침내 1697년 그는 경쟁자였던 프랑스 왕을 물리치고 폴란드 왕이 되었다.

하지만 폴란드를 탐낸 것은 프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프러시아 대왕은 폴란드 계승 전쟁에서 러시아와 한편이 되어 작센 공국과 신성로마제국의 함께 한 편과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프러시아와 러시아는 이후 폴란드를 분할하여 자국에 편입하고 말았으니, 작센 선제후의 노력은 이렇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 이후 작센 공국은 프러시아에게 점차 압도되면서 끝내 1870년 독일 제국에 흡수되고 말았다. 자기 힘으로 서지 못하고 당시 침몰하고 있던 세계 제국의 배에 편승하고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정체성과도 맞지 않는 구교로 개종했던 우매함이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박근혜가 드레스덴에 얽힌 역사를 알았을까? 그랬다면 하필 여기서 드레스덴 선언을 발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3)쯔빙거 궁

 부자는 망해도 삼년은 산다더니, 드레스덴에 그래도 남은 게 있다. 그게 바로 이 아름다운 드레스덴의 성과 드레스덴의 보물 그리스 로마 미술품이다.

아우구스트 2세 시대 작센 공국의 백성들은 대부분 신교였으니 왕이 하루 아침에 구교로 개종하자 백성들은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왕은 폴란드 귀족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이들을 위해서도 아낌없이 돈을 풀기 시작했다. 많은 예술가들을 끌어 모으고 수도 드레스덴을 유럽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도시로 가꾸기 시작했다.

▲ 쯔빙거 궁 입구   © 이병창

아우구스트 2세는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을 보고 돌아와서 그에 못지않은 궁을 지으라고 명했다. 그래서 지은 것이 쯔빙거 궁이다. 이 궁은 겉보기에도 베르사이유 궁에 못지않다. 베르사이유 궁정은 그래도 직선을 위주로 하고 다만 색채감이 화려한데, 이 쯔빙거 궁은 겉모습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어 우아한 자태가 눈을 매혹한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쯔빙거 궁을 이루는 벽돌이 모두 시커멓게 죽어 있는 것이었다.

원래 유럽에는 대리석이 별로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럽 건물들은 사암으로 지어졌다. 사암은 처음 캘 때는 무척 물러서 마음대로 다룰 수 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 비바람과 교합하여 단단하게 굳는 모양이다. 그 때문에 건축적 재료로 탁월하지만 한 가지 문제는 비바람과 교합하면서 점차 색깔이 꺼멓게 죽어간다는 것이다. 그 결과 아주 묘한 느낌이 든다. 아름다움이 부패하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니, 가끔 늙은 여배우에게서 느껴지는 감정과 같다.

▲ 쯔빙거 궁 옆의 오페라 하우스    © 이병창

왕궁의 좌우에는 신교 교회인 프라우엔 키르헤(성모 교회라는 뜻)과 구교 성당인 호프 키르헤(궁정 교회, 지금은 드레스덴 성당이라 불린다)가 마주 보고 서 있다. 왕은 구교이고 백성은 신교이니 신구교가 나란히 마주 예배를 보았을 것이다. 유럽 전체에서도 이렇게 신 구교 교회가 나란히 있는 것은 아마도 드물 것이다. 신교 교회는 바디칸 성당처럼 돔을 얹었고 구교 교회는 고딕식 첨탑을 갖고 있다.

▲ 광장에 펼쳐진 군악대 공연. 멀리 노이에 그뤼네스 게뵐베(신축 푸른 천장 박물관) 외벽에 장식된 도자기 그림이 보인다.   © 이병창

왕궁의 외벽에는 무려 100미터 정도나 되는 긴 벽에 도자기로 새겨놓은 그림이 있었다. 확인을 해 보니 그건 1871년 독일 통일 이후 드레스덴 공국의 영주인 베틴 가의 800주년 기념을 위해 세운 것이라 한다. 그 전에 이미 벽에 벽화로 그려져 있었던 것을 그때 도자기로 바꾸었다고 한다. 800년간 계속된 영주의 활동을 보여준다고 한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드레스덴은 도자기로 유명한 도시이다. 아우구스트 3세가 스파이를 파견해서 이 도자기 비밀을 얻어와 도자기 공장을 세웠다고 한다. 왕궁에 여러 박물관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도자기 박물관도 있다.

4) <그리스 문학 연구>

우리는 엘베강 북쪽에 차를 대고 아우구스트 다리를 건너 궁전에 다가갔다. 많은 사람들이 열을 지어 있어 살펴보니, 박물관이다. 아마 이 박물관 안에 아우구스트 2세 시절 빙켈만이 수집했다는 그리스 로마 미술품도 있으리라. 하지만 홍교수와 나는 시간도 빡빡하고 미술품 보는 것도 이제 지쳐서 들어가지 않았다. 속으로 안타깝기는 했다. 그 유명한 수집품을 그냥 지나가다니!

이 수집품은 슐레겔보다는 한 세대 위인 미술사가 빙켈만이 아우구스트 2세의 부탁을 받고 수집해 놓은 것들이다. 빙켈만은 그의 후원을 받아 로마로 건너갔다. 거기에서 그는 그리스 로마 미술품들을 연구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그리스 예술사>를 썼다. 이 책은 당시 유럽의 문화예술계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었던 모양이었다. 소위 새로운 르네쌍스가 일어났으니, 이 책은 괴테와 칸트, 쉴러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이른바 ‘신고전주의’라는 예술 사조가 출현했다.

신고전주의란 딴 게 아니다. 예술은 모름지기 그리스 로마의 예술을 베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등장한 미학 이론이 모방론이다. 모방론은 나중에 가면 현실에 대한 모방, 그것도 현실의 본질을 파악하는 모방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했지만 처음에는 그저 그리스 미술을 베끼자는 의미에서 모방이었다는 것을 예술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꼭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일단 충격의 물결이 지나간 다음 유럽 문화예술계에는 일대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 논쟁이란 쉽게 말하자면 그리스 로마만 최고냐? 그러면 근대인 우리는 뭐냐? 섹스피어나 괴테는 다 엉터리란 말이냐? 뭐 이런 논쟁이다.

이때 신예 문학 비평가 낭만주의자 슐레겔이 등장했던 것이다. 슐레겔은 한편으로는 빙켈만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가 바로 내가 번역한 책 <그리스 문학 연구>였다. 굳이 ‘문학’에 한정했던 것은 이미 미술품에 관해서는 빙켈만이 충분히 말했으니 나는 문학을 연구하겠다는 뜻을 함축한다. 아울러 빙켈만의 그리스 예술사의 원리와 대결하겠다는 의도도 깔고 있다.

슐레겔은 그리스 로마를 베끼는 것은 좋지만 그 정신을 베껴야지 예술작품을 그대로 베끼는 것은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 예술 정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무한성을 표현하는 것이라 보았다. 숭고한 것은 이런 무한을 표현할 때 등장하는 감정이다. 그리스 예술은 자연 속에 있는 무한한 힘 곧 운명을 표현한다. 개인은 이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치지만 결국 몰락한다. 반면 근대 예술은 인간 개인에게 내재하는 무한을 향한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 무한이란 인간 속에 현현하는 신의 모습이며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생명력, 사회적 자유와 사람들 사이의 사랑이다.

▲ 드레스덴에 있는 슐레겔의 무덤   © 이병창

철학은 자주 자기 말에 자기가 취한다. 생명, 자유, 사랑이라는 이 아름다운 말에 슐레겔은 취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중세 낭만적 소설에서 나오는 영주와 기사의 관계 속에 있다고 보았다. 이런 걸 뭐라고 할까? 눈에 뭐가 쓰인 것이라 할까? 그 때문에 슐레겔은 중세를 이상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부활을 꿈꾸었고 기독교가 지배하는 세계국가를 꿈꾸었다.

슐레겔은 나폴레옹의 독일 침략(1806년) 이후, 비엔나에서 메테르니히의 오른 팔이 되어서 활동했다. 그는 1815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독일의 통일을 위해 열린 회의에서 보수적이며 반동적인 입장을 옹호했으나 오히려 메테르니히의 미움을 받아 추방당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은거하면서 철학 저술에 몰두했고 마침내 1828년 드레스덴으로 돌아와 거기서 사망했다. 지금 그의 무덤도 드레스덴에 있다.

5) 다리파의 선언

 드레스덴은 아름다운 쯔빙거 궁 때문에 유럽 문화예술의 도시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다가 20세기 초에는 이른바 독일 표현주의 미술의 아성이 되기도 한다. 이 드레스덴의 공업기술학교 출신들이 20세기 초에 결성한 미술동인지 소위 ‘다리파’이고 이 다리파가 나중에 독일 표현주의 예술의 다리가 된다. 대표자가 바로 키르히너라는 사람이다.

왜 이름이 ‘다리파’일까? 부산 조폭 ‘칠성파’는 칠성 시장을 무대로 하여 칠성파라 하니, 이들도 주로 아우구스트 다리에서 만났거나 그 다리 밑에 진을 쳤다는 말일까? 예술사에 보면 다리파라는 말은 이들이 내세운 선언문에 나오는데, 이들은 예술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다리를 놓겠다는 의미에서 다리파라고 했다고 한다. 우연히 그 선언문을 읽어보니 재미있다. 그 선언문이 아예 미술 작품으로 되어 있다. 제목은 “표현주의 미술가 공동체 ‘다리파’의 계획” 이고 키르히너가 목각으로 새겨두었다고 한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 다리파의 선언문   © 이병창

“발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또한 창조하고 향유하는 새로운 세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함께 하자고 호소한다. 우리는 미래를 맡을 젊은이로서 가난으로부터의 자유와 생명의 자유를 창조하여 우리의 길목을 차지한 낡은 힘들에 대해 대항하고자 한다. 창조의 충동에 다가오는 것을 왜곡 없이 순전한 마음으로 재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우리의 편이다.”

이 선언문에는 낙관적 희망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들이 이런 희망을 가지고 베를린에 이르렀을 때 그들이 본 것은 무너지는 구세계의 타락이었다. 그들은 절망 속에서 몰락해 갔다. 그들이 기다린다고 생각했던 자들이 마침내 나타났는데 그 모습은 나치 돌격대이었다. 표현주의는 나치가 지배하자 곧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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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2/01 [22:36]  최종편집: ⓒ w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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