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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거랭이 들판에 우뚝 솟은 칠층모전석탑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기사입력  2019/05/10 [13:36]

 

문화재 :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보물 제459호)
소재지 : 충북 제천시 장락동 65-2번지 일원

 

제천 남쪽 외곽을 지나다 보면 넓은 들판에 우뚝 솟아 있는 탑 한 기가 눈에 들어온다. 일반 석탑과는 다른 모습의 탑은 관심의 대상이 된다. 마을 사람들은 이 탑을 장수 탑이라고 부르는데, 1000년을 지켜온 통일 신라 때 세운 7층 모전석탑이다. 이곳에는 장락사라는 절이 있다. 주변에 유명한 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형이 특이하다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장락사 뒤 주변 야산에는 소나무와 잡목이 에워싸고 있고, 옆으로는 두구매 자연부락이 있으며, 앞으로는 장락 들판이 펼쳐져 있을 뿐으로 경주의 분황사 터나 황룡사 터와 다를 바 없다.

 

▲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탑이 있는 이곳은 제천지역에서 삼국시대에 창건된 불교 유적으로 17세기까지 존속하다가 18세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통일 신라 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5차례에 걸쳐 중창이 이루어진 것으로 발굴과정에서 밝혀졌다. 통일신라,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들을 연결하는 거점 사찰의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사원은 석탑 등을 건립하여 군사적, 경제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중요한 거점 지역의 교통로를 관리 운영하였다. 이곡 장락사 주변은 주천강과 고암천 등의 수로 교통과 주변의 육로가 발달해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다. 충주와 단양을 거쳐 흥녕선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장락사지를 거쳐야만 했으므로 두 사찰은 깊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 제천 장락사지    



장락사가 자리한 이곳은 옛 문헌에 정거랭이 벌판으로 사방오리가 절터였다고 하나 지금은 벌판의 절반이 공장지대로 변해 있다. 본당에서 절골까지 오리 사이에 회랑이 연이어 있어서 수도승들이 눈비를 맞지 않고 수도했다고 하며, 사월초파일에는 3천여 명의 승려가 목탁과 바리를 치고 법요식을 거행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넓은 절터에 우뚝 서 있는 칠층 모전 석탑이 가장 먼저 내방객을 맞는다. 모전 석탑 주변에서 발굴하는 과정에 금동불상, 금동 편과 백자 편이 발견돼 이곳이 절터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절이나 모전 석탑 자체에 대한 문헌 기록이 없어 사찰이 언제 창건되고 언제 폐사되었는지 그 유래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곳에서 많은 기와 파편이 출토되었는데, 조사 지역 전체에서 유구가 확인된 시기는 고려 시대로, 가장 융성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초창기인 삼국시대 유구는 제7 건물지와 폐와 무지에서 확인될 뿐이다. 특히 기와류의 제작 시기를 볼 때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반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원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 시기는 통일 신라 때로 보고, 제2차 중창기는 12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에 장락사는 가장 큰 중창 불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제3차 중창 시기인 고려 후기에는 사역의 규모가 축소되고 제4차 중창기는 분청사기와 백자, 기와류에서 조선 전기인 15세기로 추정하고 있다. 제5차 중창기는 사원의 범위가 축소되면서 동쪽으로 편중된 것으로 보고 있다.

 

▲ 제천 장락사지    



장락사지가 밝혀진 근거는 기와의 명문에 있다. ‘長’자명 기와, ‘○○六月大吉’명 기와, ‘天○’명 기와, ‘責三’명 기와 등이다. 이 중에서 ‘長’ 자명 기와는 장락사지를 밝히는 주요한 유물 중 하나로 보고 있다. 현재의 지명과 ‘長’ 자명의 출토 기와로 볼 때 <조선왕조실록> 에 기록되어있는 자복사(資福寺)로 지정된 ‘장락사(長樂寺)’의 원위치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議政府請以名刹代諸州資福(의정부청이명찰대제주자복)’이라 적고 있다. ‘명찰로서 지복사를 대신한다.’라고 하여 ‘장락사’가 지정되었다.
고려 시대의 사찰은 종교적 기능뿐만 아니라 관청의 행사나 지역의 중요한 행사를 주관하였다. 특히 연등회나 팔관회와 같은 국가적인 행사를 사찰이 주관하여 실시하였다. 조선 태종대 이전에 이미 장락사에서 법등을 밝히는 명찰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장락사지에서 당간지주가 발굴되었다. 당간은 사찰의 큰 행사를 주관하기 위해 세웠다. 발굴된 당간지주는  잔존길이는 220cm 너비 41cm, 두께 20cm, 간공의 지름은 10cm의 규모로 여기에 당간을 세워 부처님의 설법이나 위신력을 그린 커다란 그림인 당(幢)을 걸쳤다.

 

▲ 제천 장락사지    



명찰로서의 규모를 갖추었던 장락사는 어떤 이유로 폐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찰의 중심이 되는 7층 규모의 모전 석탑이 남아 있음으로써 장락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절터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모전 석탑은 건립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장락사지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존속되었던 사찰로서 그 당사 중심의 위치에 있지 않았나 한다. 한 차례 이상 중건된 사실이 확인되었고, 6.25 전쟁 당시 포탄에 의해 1층 탑신부와 지붕돌의 남쪽 면, 2층의 동남쪽 지붕돌 및 몸돌까지 피해를 입었으나 1967년~1968년에 해체 복원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확한 조성 시기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지만, 발굴과정에서 드러난 건물지에서 모전 석탑의 조성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자료가 석탑의 북쪽과 서쪽 지역의 3개 동의 건물지와 담장 흔적을 통해 확보되었다. 건물지에서 삼국시대의 승문평기와와 선문평기와가 출토되고, 통일 신라 시대의 선문평기와와 격자문평기와가 출토되어 통일 신라 시대의 건물로 추정할 수 있다. 모전 석탑 앞의 제1 건물지는 통일 신라 시대의 평지 가람 양식이며, 이 건물은 탑을 찾는 불자들을 위한 법당으로 추정한다. 담장지와 2개의 건물지는 석탑을 출입하기 위한 시설임을 추정한다. 이와 같이 석탑 주변에 3개 동의 건물지와 담당지의 구조가 석탑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통일 신라 시대의 가람배치 구조로 탑의 조성시기를 통일 신라 시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회흑색의 점판암을 다듬어 조성된 모전 석탑은 높이가 9.1m이며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연석으로 결구한 단층 기단 위에 1층 답신 네모서리에 높이 137㎝, 폭 21㎝의 화강암으로 만든 석주를 세웠다. 이러한 수법은 안동 지방의 전탑이나 영양의 봉감모전5층석탑 등에서 볼 수 없었던 특이한 수법이다. 몸돌 남북 양면에는 화강암으로 두 개의 문기둥을 세우고 미석을 얹어 감실을 마련하고 2매의 판석으로 문비를 달았다. 감실 외부의 크기는 137×108㎝이고, 내부 감실의 크기는 남쪽이 85×60.5㎝이며, 북쪽이 85.5×63㎝이다. 문비 판석의 중앙부에는 지름 1.5㎝, 깊이 6.5㎝로 2개의 홈을 내고 별도의 문고리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1층 몸돌의 높이는 네 모퉁이의 화강암 기둥과 같고 폭은 2.8m에 이르며, 동서 양면은 전체를 크기 17~52cm, 두께 4~7cm의 석재를 다듬은 모전 석탑의 부재로 바르게 축조하였다. 지붕돌은 상하 모두 층단을 가진 전탑 특유의 형태를 갖추었으며, 추녀도 짧게 마무리하여 마치 주판알을 놓은 듯하다. 지붕 돌 받침은 8단을 두고 아래에서 위쪽으로 올라오면서 층을 일정한 넓이로 밖으로 층을 두게 하였고, 지붕도 9단을 주면서 아래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안쪽으로 줄어드는 층을 두었다. 지붕돌 밑면 받침은 9∼7단이며, 윗면의 층단도 이와 거의 비슷하여, 지붕돌 전체는 15단 내외로 구성되었다.

 

▲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추녀는 수평으로 평평하고 각 모퉁이 끝에는 풍령공(風鈴孔)이 뚫려 있는데 일부에는 풍령을 달았던 철제 고리가 남아 있다.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으나 7층 지붕돌 정상에 한 변 길이가 70㎝의 낮은 노반이 남아 있다. 그 중심에는 지름 17㎝의 구멍이 뚫려 있고, 이를 중심으로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다. 이 구멍은 찰주공으로 해석되는데, 6층의 지붕부까지 이어진다. 1층에서 7층까지의 지붕돌은 조금씩 줄어들고, 몸돌도 폭이 약간씩 줄어들게 축조를 하였다.

 

▲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각층의 체감률이 적당하게 배치되어 장중한 기품을 보여주고 있다. 6.25 한국 전쟁 때 심하게 파괴되어 있었는데, 당시 5층 몸돌에서 길이 50~54cm, 높이 31cm의 부등변 사각형의 화강암 석재가 있었고, 그 중심에 네모꼴의 구멍이 있어 사리공으로 판단했으나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1967년 복원하면서 7층 지붕 상면에서 꽃 모양으로 투각 조식 된 청동 편이 발견되어 상륜부의 구성은 청동재로 조성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몸돌의 모든 면에는 회(灰)를 덧칠하였던 흔적이 남아 있어서, 이 석탑이 상주 석심회피탑과 같은 수법으로 만들어진 석탑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99년에 보호 철책이 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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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5/10 [13:36]  최종편집: ⓒ w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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