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사회·문화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등불을 남기고 떠난 자리 ‘천등산 봉정사의 문화재’ (1)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기사입력  2018/11/16 [10:07]


문화재 : 안동 봉정사 대웅전 (국보 제311호) 외
소재지 : 경북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길 222 (태장리)

 

안동지역의 문화재답사를 하다 보면 어느 곳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망설여진다. 누각, 정자, 서원, 석탑, 종택 등 다양한 문화재가 산재해 있는 곳이 안동지역이다. 아름다운 조선의 미를 보여주는 고택과 풍부한 문화유산, 어디를 가도 물길 따라 천천히 걷는 고요한 마을, 오랜 시간의 결이 숨어 있는 고색창연한 들녘, 여행의 고장 선비의 고장으로 불리는 안동시는 어느 한 곳도 빼놓을 수 없는 전통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불교문화의 극치를 이룬 시기인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창건된 봉정사가 자리하고 있다. 봉정사는 안동을 여행하는 여행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발을 딛는 곳이다. 그만큼 안동의 명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도 손꼽을 만큼 유명한 사찰이다. 창건이 오래된 것만큼 가람배치도 아름다운 것이 마치 한국의 전통 정원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는 사찰이다. 1999년 4월 21일에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봉정사에 들려 우리 불교문화의 일부분을 살펴보고 간 후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사찰이 되었다.
 
▲ 봉정사 대웅전     


천등산(天燈山) 자락에 자리 잡은 봉정사 외에도 흘러내린 산줄기 곳곳에 사찰이 자리한 불교의 명소로 알려져 왔다. 천등산은 봉정사를 창건한 능인(能仁) 스님이 수행 정진했던 바위굴이 있는 산이다. 스님은 이곳에서 수행 정진하던 중 선녀가 나타나 유혹을 하였으나 스님이 유혹에 현혹되지 않자 선녀는 더는 유혹에 빠트릴 방법이 없어 포기하면서 “스님은 정말 훌륭하십니다. 이제 스님의 깊은 의지를 알았으니 부디 깨달음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스님의 수행에 도움을 드리기 위해 제가 갖고 온 등불을 남기고 떠납니다.”라고 하였다. 선녀가 사라진 그 자리에는 큰 등이 놓였고, 스님이 앉았던 동굴도 환하게 밝아졌다. 이후 스님은 신라의 훌륭한 대표적 고승이 되었으며, 이 일로 스님이 앉아 수행하였던 동굴을 천등굴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 굴이 있는 산을 천등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천등굴에서 수행을 마친 스님은 절을 짓기 위해 산을 돌아다녔지만, 마땅한 자리에 찾지 못하자 종이로 봉황을 접어 날려 보냈더니 학가산을 거쳐 지금의 절 자리에 앉았다. 스님은 종이학이 앉은 자리가 절터로 좋은 자리라 생각되어 672년 이곳에 절을 지었다. 봉정사라는 이름은 바로 종이 봉황이 내려앉았다고 하여 ‘봉정사’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봉정사 경내를 돌아보면 대웅전을 중심으로 극락전과 고금당, 화엄강당, 삼성각, 덕휘루, 요사채인 무량해회 등이 서로 얼굴을 비껴가며 배치되어 있어 어떤 건물이 중심 건물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한 느낌을 주는 가람배치이다.  봉정사를 이야기할 때면 역사적인 발자취를 들춰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자료를 들춰도 특별히 내세울 만한 기록은 고려 태조와 공민왕이 다녀갔다는 정도이다. 그러나 이야깃거리는 건축물 하나에 모두 담겨있다. 어떤 건물이든 눈으로 보면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그 가치를 엿볼 좋은 기회가 된다.
 
▲ 명옥대     


가파른 봉정사로 가는 길에 먼저 명옥대(鳴玉臺)라는 정자를 만난다. 지나칠 수 없는 정자이다. 물이 옥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누대라고 하여 이름한 정자이다. 이곳은 천등산에서 내려오는 작은 물줄기가 바위 아래로 폭포를 이루어 떨어진다. 폭포가 있는 옆 작은 공간에 팔작지붕의 형태를 갖춘 건물이 명옥대이다.

명옥대는 퇴계 이황 선생이 16세 때 봉정사를 찾아 학문을 배우며 놀았던 곳으로 원래 이름은 물이 떨어지는 곳이라 하여 ‘낙수대(落水臺)’라고 불렀었다. 선생이 50년이 지난 1665년(현종 6) 다시 이곳을 찾아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다시 들었을 때 문득 육사형(陸士衡)의 글 중에 “폭포수 튀는 물이 옥구슬 소리 같다((飛泉漱鳴玉)‘라는 시귀가 생각나서 ’명옥대(鳴玉臺)‘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퇴계 선생은 50년이 지나 이곳을 찾았을 때 함께 수학하던 사촌 동생과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즐기던 그때를 회상하며 시 한 수를 남겼다. ‘此地經遊五十年 韶顔春醉百花前 只今手人何處 依舊蒼巖白水懸.' 이곳에서 노닌 지가 50년이 지났으나/늙은이 얼굴도 수백 가지 봄꽃에 취하는구나/손잡고 놀던 이 지금은 어디 갔나/푸른 바위에는 여전히 하얀 물줄기 걸려 있는데.'

정자에는 ’鳴玉臺(명옥대)‘ 현판과 옆에 ’蒼巖精舍(창암정사)‘라는 또 하나의 현판이 나란히 걸렸다. 정자 건너편 바위에는 ’鳴玉臺‘ 각자와 퇴계 선생을 추모하는 후학들이 글을 새겨 넣었다. 이 글은 퇴계 선생이 50년 만에 이곳을 다녀간 지 2년 후에 새겼다. ‘辛乃玉 李宰 文緯世 尹剛中 欽中 端中 隆慶元年夏 同遊開林 築臺題詩 以追退溪先生之志 신내옥, 이재, 문위세, 윤강중, 흠중, 단중 형제가 융경 원년(1567) 여름에 이곳에서 수풀을 헤치고 노닐다가 대를 쌓고 시를 지어 퇴계 선생의 뜻을 기렸다.‘
 

▲ 일주문     



봉정사에 접근하려면 먼저 일주문을 들어서야 한다. 평탄한 길을 한참 오르다 보면 갑자기 평탄한 지역을 만나고 다시 숨을 고르고 가파른 길을 오르면 앞에 ‘천등산 봉정사(天燈山鳳停寺)’ 현판이 보이는 일주문이 와 닿는다. 1900년에 이곳에 세운 일주문은 사찰로 들어서는 첫 관문이자 사찰의 경계이다. 일주문을 지나는 것은 곧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일주란 기둥이 하나라는 것으로 이는 한마음을 뜻하는 것이다. 항상 한마음을 가지고 수도하고 교화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일주문을 이곳에 세운 까닭은 사찰로 오르는 길이 급한 경사를 이루다가 이곳에서 평지를 이루기 때문에 일주문을 세웠다. 자연석을 이용해 허튼층쌓기로 시단을 만들고 그 위에 기둥을 나란히 일직선상에 세우고 공포를 짜서 결구하고 도리를 걸친 후 서까래를 걸어 완성했다. 공포의 구조는 다포양식을 사용하였으며,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고 측면에 일자형 풍판을 설치한 구조이다.

일주문을 지나 만세루에 오르기 위해 앞에 서면 자연석을 이용한 돌계단이 가파르게 위험을 느껴질 만큼 높게 보인다. 천천히 밟은 돌계단의 돌과 돌 사이에 파랗게 돋아난 야생초가 부드러운 촉감에 와 닿는다. 계단에 올라서면 모습을 드러낸 누각은 무게감을 느끼게 하며 처마에 ‘天燈山鳳停寺’현판이 걸려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자연석 기단에 자연석 주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아래층 중앙을 통해 대웅전 앞마당으로 오른다. 건물의 내부에는 법고, 운판, 목어가 있으며 범종각은 별도로 두었다.
 

▲ 만세루(덕휘루)     



1680년에 건립된 만세루의 원래 이름은 ‘덕휘루(德輝樓)’였다. ‘덕휘루’의 ‘덕휘’는 덕이 빛난다는 의미로, 나라가 태평하면 하늘에서 봉황이 내려온다는 전설과 관련되어 있다. 중국 전한 시대 가의(賈誼:BC 200~168)가 지은, 굴원의 절개를 기린 ‘조굴원부(弔屈原賦)’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봉황새는 천 길 높이로 날면서 덕이 빛나는 곳을 보고 내리고, 덕이 없고 험악한 조짐을 보일 때면 날개를 거듭 쳐서 멀리 날아가 버린다(鳳凰翔于千兮 覽德輝而下之 見細德之險微兮 遙增擊而去之).’ ‘덕휘’는 이 글귀의 ‘남덕휘이하지(覽德輝而下之)’ 중에서 따온 것이다. ‘德’은 유교에서 가장 강조하는 인간의 품성이니, 봉정사가 있는 안동지방은 굴지의 유향인 것과 맥을 같이 하는 의미에서 덕휘루라고 한 것 같다.
 

▲ 만세루(덕휘루)     



덕휘루 아래 중앙통로 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대웅전 마당이 펼쳐진다.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1962년 해체 수리 때 발견된 묵서명에서 ‘1435년(조선 세종 17년)에 이르러 법당을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연혁이 밝혀졌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대웅전은 장식이 없는 2첨차의 다포양식 건물이다. 앞면에는 4분합띠살청판문을 달았고 동면과 서면에 한 칸의 문을 달았다. 뒷면은 원래 판문이 달아져 있었으나 지금은 폐쇄되어 있다. 고주를 법당 중심에 두고 불단과 후불벽체를 조성하여 어칸과 협칸을 구분하였다. 후에 툇마루를 달아 앞면의 이동과 조망을 용이하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건물의 멋을 풍기게 하는 방안으로 첨차를 단순하게 2단계로 장식 없이 두었고, 수직에 비해 수평 기둥을 길게 하여 수평적 안정감을 두게 하였고, 희미하게 남아 있는 단청을 그대로 두어 목재의 무늬결과 단청의 어우러짐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개체하지 않았다. 건물 전면에 툇마루를 설치한 것도 다른 사찰과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 시대의 사찰 건축물의 특징을 살리면서 조선 전기 건축의 모습에서 조선 중기 이후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 대웅전 측면     



대웅전의 좌측에는 스님들의 생활공간이며 휴식공간인 요사채로 쓰이는 무량해회(無量海會)가 자리하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겹처마 집에 전면과 남쪽에 툇마루를 놓고 양쪽의 중앙에 칸 벽을 설치하여 방이 나누어진 요사이다. 정면의 각 칸에는 4분합띠살청판문을 우측 칸에 달았고 중앙 칸과 좌측 칸에는 띠살청판문을 두 짝씩 달았다. 남쪽 면에는 축단 밖 단하로 튀어나온 열주(烈柱)로 받쳐진 누와 후면 내정 쪽에 쪽마루가 연결되어 통로는 3면에 이어졌다. 해회당 몸체에서 약 2미터가량 띄어 'ㅌ'자를 뒤집은 형태로 요사가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트인 ㅁ자형' 평면을 이룬다. 안마당을 둘러싼 북쪽의 방사 모서리에 '염화실'을 두었다. 2칸 방과 작은 대충 그리고 단칸방 둘이 꺾여 북동쪽을 막고 4칸의 넓은 부엌은 동남 모서리에 돌출된 남쪽으로 3칸 통의 큰 방을 만들었다. 중정에 면한 본채는 겹처마와 익공이 가구 된 비교적 높은 건물이나 ‘ㄷ’자의 후원 요사 부분은 홑집으로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안마당을 향한 본채 뒷면 각방에는 띠살문 옆에 살대를 꽂은 광창이 설치되어 있다.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8/11/16 [10:07]  최종편집: ⓒ wngo
저작권자(c)한국엔지오신문.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