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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난돌 정 맞고 태어난 무안의 ‘석장승’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기사입력  2018/08/03 [10:30]


문화재 : 무안성남리석장승(務安城南里石長栍) 전남민속문화재 제25호
            총지사지석장승(摠持寺址石長栍) 전남민속문화재 제23호
            법천사석장승(法泉寺石長栍) 전남민속문화재 제24호

 
소재지 : 전라남도 무안군 무안읍 몽탄면

전라남도 무안을 여행하다 보면 우연히 마주치는 석장승을 볼 수 있다. 무안 성남리 석장승, 무안 몽탄면 대치리의 총지사지 석장승, 몽탄면 달산리의 법천사의 석장승이 그러하다. 언제부터 각 마을에 석장승을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마을과 사찰로 가는 어귀에 세워진 석장승은 각각 의미하는 성격이 다를 수 있다. 석장승을 길목에 세우는 일반적인 의미는 마을과 산천의 안녕과 풍요를 위해서 세웠다는 설과 사찰로 들어가는 어귀에 세운 것은 사찰의 영역과 마을의 영역 경계를 표시하는 의미가 있다는 설이다. 석장승을 마을 어귀와 사찰 어귀에 세운 것은 이곳부터 마을이 시작되고, 이곳부터 사찰이 시작됨을 알리는 이정표의 역할이 가장 먼저 시작된 것으로 본다. 큰 돌이나 큰 나무를 세워 마을을 알리는 방법도 있었을 것인데, 굳이 돌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고 큰 나무를 사람의 형상을 하여 세웠을까 하는 것도 생각해볼 문제이다.
 
▲ 무안 성남리 석장승     


석장승은 이름난 석수에 의해 깎아 만든 장승도 아니다. 특출한 기술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투박한 모습을 하고 왕방울만 눈에 주먹만 한 코 등은 자연에 귀속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마을 사람들의 정성이다. 장승은 먼저 사찰의 토지 경계 표시에서 왔다는 장생고 표지설이다. 총지사지석장생과 법천사 석장생이 그러하다. 솟대라던가 선돌, 서낭당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고유민속 기원설도 있다. 또한 남방 벼농사 기원설과 환태평양 기원설과 같은 비교민속 기원설 등이다. 고유민속 기원설에서 장승을 솟대, 선돌, 신목, 벅수 등과 함께 선사시대의 원시 신앙물로 유목문화 및 농경문화의 소산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장승과 벅수는 나무와 돌에 얼굴을 새겨 땅에 꽂아 놓은 신성물이라는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벅수는 원래 ‘법수’라는 선인의 이름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벅수는 법수 선인의 얼굴을 본떠서 마을에 세워두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마을신 중 상위 신으로 여겨지는 서낭신, 용왕신과는 달리 벅수는 하위 신으로 서민들이 삶과 더욱 밀착해 있었다. 마을 안으로 잡귀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병마를 막아주는 수호신의 역할을 맡아서 했다.
 
▲ 무안 성남리 석장승     


장승은 벅수와 달리 불교적인 색체를 띠며, 몸이 아프면 혈의 흐름이 흩뜨려졌다고 하여 침을 맞아 안정을 취하는 격이다. 산천에도 기의 흐름이 있는데 이때 침의 역할을 하는 것이 비보이다. 고려시대에 불교가 성행하던 시기에 비보의 역할을 하는 장생과 사찰이 성행했다. 그러나 조선시대로 넘어 오면서 억불숭유 정책이 시행되면서 비보의 역할이 축소되고 장생은 장생으로 어원이 바뀌면서 마을과 수호신앙과 자연히 연결되었다. 조선중기에 와서는 장생을 노표의 역할과 연결시켜 노표장생을 많이 세웠다. 이것이 오늘날의 장승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 벅수와 장승 모두 역할의 구분이 사라지고, 본래 인자한 모습의 벅수가 귀면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에서 오는 천연두를 막기 위해 벽사의 기능을 가지면서부터이다. 장승도 귀면의 형태로 바뀌면서 마을입구에 세워 마을로 들어오는 잡귀를 막는 수호신 역할을 하게 되었고, 노표장생의 기능을 함께 가지게 되었다. 장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거리의 표식으로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기능까지 갖게 되었다.
 
▲ 총지사지석장승     


우리는 마을 어귀라던가 길가에 세워 놓은 목장승을 많이 보아 왔다. 그러나 장승이 언제부터 마을 어귀나 사찰 어귀에 있어왔는지는 알 수 없는 데 제정일치 시기 씨족, 부족민의 공동적 염원을 담은 지배이념의 표상 기능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한다. 또한 이러한 기능이 삼국시대로 넘어오면서 불교와 도교, 유교 등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체계화 되어 불교와 습합되어 전승되었다는 일반적 견해로 보고 있다.

장승은 돌과 나무를 소재로 만들어지고 있으나 어디에 세우느냐에 따라 마을 장승과 사찰장승, 공공 장승으로 구분한다. 성남리 석장생은 마을장승이고, 총자사지와 법천사 석장생은 사찰장승으로 보고 있다. 공공장승은 제주도의 성문 앞 하르방에서 찾을 수 있다. 마을 입구에 수호신으로 모신 상당으로서 장승이 일반적이고, 사찰 장승은 풍수지리설에 의한 보호와 진압의 기능을 지녔으며, 성문이나 병영, 길과 바닷길의 안전을 지키는 기능을 지닌 공공장승이 그 기능을 지녔다.
 
▲ 총지사지석장승     


이처럼 장승의 위치나 목적에 따라 기능이 다르지만, 단순한 경계표나 이정표의 역할에서부터 잡귀와 질병에서 사람을 보호하는 수호신, 개인의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능을 가진 장승은 언제부터 어떤 목적으로 세워지게 되었는가는 시대별 추이에 따라서, 신라 말기의 ‘장생’의 주 기능은 임금의 만수무강에 있었고, 고려에 와서는 국가비보사찰을 표기하면서부터 국기의 연장을 위한 산천비보 장생이 되었다. 조선시대로 넘어 오면서 사찰영역의 경계를 표시하다가 점차 그 기능이 소멸하였다.

무안 성남리 후청마을 남문 밖의 석장승(전남민속문화재 제25호)은 마을로 들어오는 잡귀를 막는 수문신의 기능과 소원을 이루어 주는 수호신적 기능을 가진 신앙석상으로, 오랫동안 음력 정월에 마을의 풍년과 평안을 비는 당산제와 거릿제를 지내왔었다. 이때 마을 부녀자들은 소원을 빌고 단골아비가 축언을 하여 주기도 하였었다. 이 석상은 1741년(영조 17) 고문서로 남아 있는 향약계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붉은 반점이 있는 화강암을 이용해 사면체 돌기둥을 전면 몸체만 거칠게 다듬어 정면에 ‘동방대장군(東方大將軍)’과 ‘서방대장군(西方大將軍)’의 글씨를 새겼다. 머리 부분은 건을 쓰거나 민 대머리를 하였고, 귀는 쪽박귀의 형태로 만들었다. 얼굴의 코는 치켜 올라갔고, 코는 우뚝 솟아 세모나고 입은 한일(一)자이다. 1972년 2월부터 당산제와 거릿제가 없어지고, 1984년 5월 남산공원으로 이전하면서 예술작품으로 공원에서 전시되고 있다.
 
총지사지석장승(전남 민속자료 제23호)은 총지마을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 총지사와 500m의 거리를 두고 있는 석장생이다. 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거대한 화강석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살려 아무런 조각이 없는 민둥머리와 이마, 커다란 왕방울 눈, 우뚝 솟은 주먹코와 작은 입이 조각되어 있다. 북쪽의 장승이 수염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 男장승이고, 남쪽의 장승은 수염이 없는 것으로 보아 女장승으로 보고 있다. 자연석을 이용하여 얼굴 부위만 형상화 하였다. 두 장승의 얼굴을 보면 女장승이 강인한 면이 풍긴다. 특히 이마에는 부호와 같이 백호가 새겨져 있어 사찰과 연계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장승의 크기는 145cm에 이르고 여장승의 크기는 172cm이 된다. 이 장승은 언제 만들어졌는지 기록이나 명문이 없어 시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총지사에 대한 내용이 수록된 <면성지(綿城誌)>에 조선 현종 7년(1666)에 사찰이 중건되고, 인면형 장승의 출현이 대체로 조선 후기인 점을 감안하면 이 두 장승의 제작연대를 17세기 중엽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장승을 총지사와 관련된 사찰장승으로 보는 이유는 주변 마을과의 관련사실이 밝혀진 바가 없으며, 장승의 이마에 백호가 새겨지고, 사찰의 경계로 본다면 일주문의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의미로 본다면 이 장승은 사찰의 가장 외곽에 위치하여 사찰의 경계를 표시하고 사찰로 들어오는 사람은 오직 일심에 귀의한다는 결심을 갖도록 마음을 촉진시키는데 있고, 잡귀와 잡신을 막아주는 경계표와 교화적, 수호신적인 기능을 아울러 가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경내에서의 수렵과 어로 등의 금지를 알리며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상의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 법천사석장승     


법천사 석장승(전남민속문화재 제24호)은 승달산 동쪽계곡에 위치한 법천사 입구의 작은 길 좌우측에 서있다. 법천사는 유서 깊은 사찰로 『동국여지승람』 무안군 산천조에 "원나라 임천사의 승려 원면이 바다를 건너와 이 산에 암자를 짓고 임천에 있던 제자 500명이 원명을 찾아와 도에 통달하여 승달산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찰 남쪽 입구에 세워진 장승은 길의 북쪽이 男장승, 마주하는 남쪽이 女장승이다. 두 장승의 조각 수법은 목 부분만 뚜렷하게 파내어 상하를 구분하였고, 얼굴의 눈, 코, 입 등은 주위만을 파내어 사실적인 입체감은 부족한 편이다. 투박한 돌을 거칠게 깎아 만든 두 장승은 커다란 황소 눈에 주먹코이다. 입은 다물고 있지만,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에서 시골의 노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장생의 보편적 인상인 해학과 괴기스러움을 아울러 갖추고 있어 벽사의 상징성이 잘 표현되고 있다. 법천사 입구에 세워진 이들 장승은 사찰의 재산과 금렵, 불살생, 잡귀를 막아주는 금표적 기능과 사역표식의 기능을 갖는 사찰장승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법천사석장승     


장승의 코를 청정수에 타 마신다든지 돌을 쌓고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는 일, 튼튼한 아들을 갖기 위해 장승의 배에 아녀자들이 자신의 배를 맞추어 본다든지 하는 것 등은 사찰장승의 본래 기능에 구복과 아들을 바라는 민간 신앙적 요소, 그리고 석적단과 서낭당 신앙이 뒤에 가미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조선 인조(재위 1623∼1649) 무렵 원명스님이 법천사를 중창할 당시에 함께 세워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들의 삶 속에서 친근한 수호신이었던 장승의 모습이 전통문화 속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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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8/03 [10:30]  최종편집: ⓒ w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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