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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자유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기사입력  2019/08/21 [23:46]

 

 

 

 강자의 논리에 따르면, 약자는 강자에게 지배받아 마땅하다. 이때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겉으로 보면, 무력이 더 우세하면 강자고 그렇지 못하면 약자다. 한 단계 더 들어가서 보면, 무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이 강하면 강자고 그렇지 못하면 약자다. 또 한 단계 더 들어가서 보면, 자유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자는 강자고 목숨을 위해 자유를 버리는 자는 약자다.

 

 강자의 논리는 개인들보다 집단들 사이에서 더 잘 작동한다. 개인은 쉽게 눈에 띄지만, 집단은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다. 내놓고 자신이 더 강하다고 내세우는 자는 자칫 속물로 취급되기 쉽다. 하지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집단들 간에는 강자의 논리가 집단 무의식적으로 쉽게 표현된다.

 

 자신들이 강자라고 여기는 집단은 약자라고 여기는 집단을 덜 인간화되어 있고 그만큼 더 동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약자의 집단은 자유보다 생명을 더 중시한 나머지 굴욕과 예속을 수치라고 생각지 않고 오히려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우둔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여긴다.

 

 강자의 논리는 보편적인 원칙이나 가치의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다. 목숨보다 자유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 원칙이라면 원칙일 것이다. 하지만, 그 자유를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자들에게까지 자유를 허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강자의 논리에 따른 자유의 원칙은 보편적이지 않다. 그래서 약자에게서 자유를 빼앗고 인권을 말살한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했던 과거를 잘못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권리는 현재 그들보다 더 강한 자들에게만 허용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약한 탓에 식민의 예속을 경험한 집단은 강하기에 식민의 지배를 부린 자들에게 잘못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항간의 말은 강자의 논리가 관철되는 시대적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다. 강자의 논리에 따르면,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자유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롭지 않을 자유가 없다.”라고 한 사르트르의 말은 강자를 지칭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근본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이다.

 

 강자에게 저항하지 않고 친밀하게 굴고, 친밀하게 구는 것을 건방지다고 여기면 일정하게 굴복하고, 굴복하는 것마저 부족하다고 여기면 아예 예속되어서라도 생명을 보존하는 것은 약자에게 할당된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여기는 것은 약자의 논리다. 하지만 이런 약자의 논리는 강자의 논리에 속해 있다. 그 핵심은 ‘약자는 자유로울 자유가 없다.’라는 것이다.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생명만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자 역시 아무도 없다. 자유롭지 않을 자유를 가진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헤겔은 자유를 위해 생명을 저버릴 수 있는 자는 주인이고, 생명을 위해 자유를 포기하는 자는 노예라고 말한다. 그래서 노예는 주인의 노예가 아니고 생명의 노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는 자기의식에 주인의식과 노예의식이 공존하면서 투쟁한다고 말한다. 자신을 강자라고 여기는 자에 의해 나에게 극단적인 위기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한 번만 살려주세요!’라고 외치면서 목숨을 애원할라치면, 같은 자기의식의 다른 곳에서 ‘죽일 테면 어디 죽여봐!’ 하고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인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자기의식에서 이같이 주인의식과 노예의식이 일어나 충돌을 일으켜 싸우기도 하거니와 한 집단 안에서 주인의식과 노예의식이 일어나 충돌을 일으켜 싸우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한쪽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생명이 위기에 처했는데 자존심이니 자립심이니 하는 한갓 감정을 내세워 무책임하게 잘난 척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다른 쪽에서는 우리의 생명이 과연 그렇게 허약한 것은 자립심도 자존심도 없는 맹목적인 생명에 불과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생명을 걸고서라도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인과 노예의 대결은 쉽게 주인의 승리로 끝날 것 같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헤겔에 따르면 주인은 노예의 노동에 의존해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에 길든다. 다른 한편 노예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생산물을 통해 반영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주인은 노예의 노예가 되고, 노예는 주인의 주인이 된다.

 

 타인의 생명을 겨누고 노리는 자는 기실 타인의 자유를 겨누어 탈취하고자 하는 자다. 자유는 생명의 가치를 결정하는 척도이고, 얼마나 자유로운가에 따라 생명의 가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강하다는 것과 약하다는 것의 판별은 얼마만큼 자유를 위해 생명을 활용하는가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의 전략 전술을 구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 보 후퇴에 스며들어 있는, 오로지 목숨 부지를 위한 기회주의적인 속내를 정확하게 제거하기가 전혀 쉽지 않다. 이 보 전진은 핑계일 뿐 일 보 후퇴가 바로 투항이기 쉽다. 특히 그동안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계속해서 싸워 온 자가 아닐 경우 더욱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인생의 최선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행복은 인간 고유의 기능인 “탁월성에 따른 이성적인 영혼의 활동” 자체라고 했다. 그러면서 탁월성에 지적인 탁월성과 성격의 탁월성이 구분되어 있다고 말하고, 성격적 탁월성의 핵심을 중용이라고 했다. 죽음이 두렵다는 감정을 가지면서도 정의로운 일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 중용에 의한 용기라고 말한다. 전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서 나아가면 만용이 되고, 죽음을 너무 두려워해서 물러서면 비겁함이 된다고 했다. 매사에 중용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지혜를 ‘프로네시스(phron?sis)’ 즉 ‘실천적 지혜’라고 말하면서, 실천적 지혜를 발휘하여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만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자유를 위한 이성적 활동을 포기하는 일이 없다는 이야기다.

 

 삶은 습관이다. 많은 물질적 여유를 누리다가 그러지 못하는 처지가 되면 불행하다고 여기고, 조금의 물질적 여유만을 갖다가 조금 더 여유를 갖게 되면 행복하다고 여긴다. 모두가 가진 것을 잘 배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누면 풍족한데, 거머쥐고 있으면 부족하다. 집단 구성원 모두가 자유를 위한 생명을 추구한다면, 나누는 일을 더욱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다. 두려움은 거머쥐게끔 하고, 거머쥐게 되면 그만큼 부족하다고 여기게 된다. 위기가 닥치면 알곡과 쭉정이가 구분되어 드러난다. 위기가 기회인 까닭이다.

 

<본 칼럼은 '인권연대'에 게재되었으며, 저자의 허락하에 본지에 게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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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8/21 [23:46]  최종편집: ⓒ w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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